[수원=스포츠투데이 이종길 기자]어느덧 여섯 번째 해고. 노장 감독은 쓸쓸히 프로무대를 퇴장했다. 은퇴는 아니다. 고희를 앞뒀지만 여전히 야구에만 매달린다. 그 형태는 전도사다. 벼랑 끝으로 내몰린 학생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한다. 열정은 이전과 다르지 않다. 매서운 눈과 차가운 말투로 선수들의 허를 찌른다. 김성근 전 SK 감독(69)의 야구다.
김 전 감독은 지난 5일부터 성균관대학교 야구부의 인스트럭터로 일하고 있다. 성수동 자택에서 수원에 위치한 야구장을 매일 출퇴근한다. 훈련 합류는 제자인 이연수 성균관대학교 감독의 간곡한 부탁으로 이뤄졌다.
이 감독은 “돈 주고도 배울 수 없는 기술을 다양하게 보유한 분”이라며 “SK구단에서 경질된 다음날 바로 전화를 걸어 부탁을 드렸다”고 밝혔다. 이어 “주위에서 ‘노장 감독이 와서 불편하지 않느냐’고 우려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나 역시 좋은 배움의 기회를 얻었다”라고 만족스러워했다.
23일 오후 1시 성균관대 수원캠퍼스에서 김 전 감독을 만났다. 지바롯데 코치시절 유니폼을 입은 그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선글라스를 쓰고 타자들의 타격 폼을 유심히 지켜봤다. 시선은 한 곳에 머물지 않았다. 티 볼을 소화하는 타자 3명과 배팅 볼을 때리는 타자 2명 사이에서 바쁘게 눈을 움직였다.
“크게 치려고 하지 말고 정확하게 휘두르란 말이야. 맞출 생각을 먼저 해야지.”
김 전 감독은 두 손으로 허리를 감싸고 5명의 타격을 동시에 점검했다. 선수들은 한눈을 팔 겨를이 없었다. 제각각 지적받은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타격에 몰두했다. 공을 맞출 때마다 신음이 새어나올 정도였다.
이날 가장 앓는 소리를 많이 낸 건 3학년 내야수 고영우였다. 타격 뒤 두 팔이 타구방향으로 제대로 뻗지 않아 40분 이상 과외를 받았다. 좀처럼 자세를 잡지 못하자 김 전 감독은 1학년 내야수 정건창을 불러들여 고영우를 앞에 두고 타격할 것을 주문했다. 정건창은 잠시 망설이는 듯싶더니 이내 배트를 매섭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타격 폼을 유지해야 해. 팔만 보지 말고 하체도 어떻게 연결되는지 관찰해봐. 잘했어. 나이스.”
고영우는 지난해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에서 타율 5할5푼6리(9타수5안타)를 기록하며 타격상을 받은 주인공이다. 2010 세계대학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22명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김 전 감독의 지도에 수상, 경력 등은 고려되지 않았다. 체면도 마찬가지였다. 비교대상이 후배더라도 장점이 있으면 늘 직접 보고 익히게 했다.
이를 통해 노린 효과는 기술 습득에 그치지 않았다. 고영우의 분발과 정건창의 자신감 회복을 동시에 유도했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고교 졸업 뒤 프로구단으로부터 지명을 받지 못했다. 절박함을 가지고 있기에 의도가 빗나갈 가능성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훈련 뒤 고영우는 “국내 최고의 지도자로부터 과외를 받아 영광이다”라며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정건창은 “칭찬을 받아 기분이 좋다. 처음으로 ‘내가 잘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지적받은 단점만 보완하면 한결 나은 스윙을 뽐낼 수 있을 것 같다”고 기뻐했다.
사실 타자들은 이전까지 김 전 감독의 교육에 섭섭함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학교를 찾은 5일부터 2주간 투수 쪽에만 신경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정건창은 “야수 쪽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셔서 우울했는데 일주일 전부터 타격훈련을 관리해주신다”며 “얼마나 기쁘던지 다른 대학의 친구들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다”고 말했다. 최근 넥센 구단과 입단 계약을 맺은 4학년 외야수 박정음은 “후배들이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 일부러 김 전 감독의 주변을 배회한다”며 “야구장을 찾는 것만으로도 선수들을 집중하게 만드는 분”이라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타자들의 신음은 오후 3시가 되어서야 멈췄다. 김 전 감독은 체력단련실로 이동해 뒤늦게 점심을 해결했다. 식사는 단출했다. 도시락 뚜껑 너머로 공개된 음식은 다 식은 우동과 볶음밥. 그는 벤치프레스에 겨우 엉덩이를 기대어 입을 달랬다. 그리고 틈틈이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려 선수들의 움직임을 확인했다. ‘훈련 강도가 프로 구단 지휘 때보다 더 높은 것 같다’는 질문에 김 감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학교는 야간운동을 안 하잖아.”
그는 국내 최고의 감독이지만 타고난 교육자기도 하다. SK구단으로부터 해임 통보를 받은 뒤 경남 지역을 돌며 리틀 야구단과 중학교 팀을 가르쳤다. 김 전 감독은 “아이들이 가르침을 받고 좋아하는 표정을 보이면 즐겁다. 사명감이 들 때도 있다”고 밝혔다. 이어 “어떤 곳이든 느끼는 보람이야 같다. 야구장에서 일하는 건 매한가지니까. 큰 고민은 없다. 편하게 마음을 먹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연수 성균관대학교 감독은 이런 은사와 오랜 시간 함께하길 고대한다. 그는 “인스트럭터지만 특별히 기간을 정하지 않았다”며 “높은 레벨의 야구를 더 많이 배우고 싶다”고 밝혔다.
그의 눈은 이날도 어김없이 처음 접하는 훈련에 매료됐다. 김 전 감독은 투수들의 피칭을 관찰하다 약 3m 높이의 정사각형 그물을 불펜에 가져오게 했다. 그는 이내 3학년 투수 김건우에게 손의 회전만을 이용해 공을 그물 위로 넘길 것을 주문했다. 다른 투수들에게는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내는 연습을 시켰다. 이를 지켜보던 이 감독은 “커브 등의 변화구를 저렇게 단련시킬 수도 있구나”라며 놀라워했다.
이색 훈련은 타자 지도에서도 엿보였다. 김 전 감독은 1학년 외야수 김요셉의 타격에서 상체가 일찍 앞으로 나온다는 점을 발견하고 이내 두 무릎을 붙이게 했다. 그는 시계방향으로 무릎을 돌리면서 공을 치게 했다. 제자가 타격에 자꾸 애를 먹자 김 전 감독은 “자꾸 몸이 먼저 나가면 어떡해. 타격은 상체보다 하체 리듬이 중요한거야. 다시 해봐”라고 말했다. 그렇게 지도는 팀 훈련이 끝난 뒤에도 30여 분간 계속됐다.
훈련 뒤 김요셉은 특별과외에 큰 만족감을 보였다. 그는 “하체 힘을 한 번에 실을 수 있게 된 것 같다”며 “직접 시범까지 보여주시는 노력에 감동을 받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팀 훈련이 끝났는데도 지친 기색 없이 타격을 관찰해주시는 모습에 팀원 모두가 감사해한다”고 덧붙였다. 이 감독은 적잖은 나이의 스승을 위해 불펜과 홈플레이트 근처에 각각 의자를 준비했다. 하지만 이날 김 전 감독은 한 번도 의자에 엉덩이를 기대지 않았다. 꼿꼿하게 서서 선수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의 근원은 철저한 자기관리에 있었다. 이 감독은 “야구장에 오면 가장 먼저 찾는 곳이 체력단련실”이라며 “한 시간 이상 웨이트 트레이닝에 몰두한다”고 전했다. 운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김 전 감독은 아침마다 자택 인근에서 조깅을 한다. 훈련 뒤에는 자택 인근에 위치한 리베라호텔 헬스클럽에서 러닝과 웨이트트레이닝을 소화한다.
김 전 감독에게 선수 이상의 운동량을 유지하는 이유를 물었다. 돌아온 답변은 간단했다.
“살기 위한 노력.”
“무슨 말씀이세요. 아직 정정하신데요”라는 관계자들의 말에 그는 “아프면 야구장에서 할 일이 없어진다”고 했다. 이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 인생의 전부인 야구를 잃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야구장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성균관대 간판타자 박정음과 미니 인터뷰
성균관대학교 4학년 외야수 박정음은 올해 대통령기대학야구에서 정확한 타격과 빠른 발로 팀에 우승을 안겼다. 기량을 인정받은 그는 지난 8월 2012 프로야구 신인드래프트에서 넥센으로부터 4라운드 지명을 받았다. 박정음은 프로 데뷔를 앞두고 만난 김성근 전 SK 감독을 천군만마로 여긴다. 혹독한 훈련 뒤에도 미소를 지으며 “가르침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김성근 전 감독의 지도 소식을 언제 처음 접했나.
SK구단에서 경질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가을훈련 때 원 포인트 레슨만 한다고 들었다. 이렇게 오래 계실 줄은 몰랐다.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나.
물론이다. 소식을 어떻게 들었는지 팬들이 야구장 주변을 서성였다. 영문을 알 턱이 없는 후배들은 어리둥절해했고.
가르침을 받은 소감이 궁금하다.
대한민국 1등 감독답다. 배울 점이 무척 많다. 수준도 높고. 생각의 깊이부터 다르시다. 타격에서 간과했던 부분들을 많이 알려주신다.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나.
물론이다. 타구의 질이 달라졌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선수들이 그러하다. ‘김성근 매직’이라는 말을 실감하고 있다.
타자들을 가르칠 때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가르치나.
허리와 하체 이용이다. 상체에만 의존했던 선수들이 모두 하체를 쓰게 됐다. 타자들의 타구거리가 대체적으로 길어졌다.
불펜투수들의 고생이 많아 보이는데.
김 전 감독은 배팅 볼을 무조건 투수가 던지게 한다. 전력투구가 아니더라도 500개 이상을 던지는 투수들을 보면 솔직히 딱할 때가 있다.
김 전 감독이 지도에 나선 뒤 바뀐 풍경이 있다면.
설렁설렁 하는 선수가 없다. 모두 훈련에서 강한 집중력을 발휘하는 것 같다. 눈에 띄려고 노력하는 친구도 많이 보인다. 모두가 김 전 감독의 가르침을 받는데 자부심을 느낀다.
스포츠투데이 이종길 기자 leemean@
스포츠투데이 정재훈 사진기자 ro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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