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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독서

조율에만 열중하고 조율에만 만족한다. - 조율사




그것은 참으로 기이한 환영이다. 가령 여기 어떤 악단이 있다. 그들은 청중이 없어서든지 적당한 장소를 얻지 못해서든지 오래도록 연주회를 갖지 못한다. 또 그 이유를 그들의 연주 곡목이 어떤 특정한 집단의 비위에 거슬리는 것뿐이어서 언제나 연주 허가를 받지 못한 때문이라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여튼 그들은 오래도록 연주회를 갖지 못한다. 그래서 악사들은 가끔 모여 앉아 옛날에 있었던 연주회의의 화려한 추억을 나누고, 언젠가 있게 될 새로운 연주회에 대한 희망도 가져 본다. 하지만 연주회는 언제지나 마련되지 않는다. 그렇게 무한정 시간이 흐른 다음을 상상해 보라. 그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이 될 것인가. 아마 그들은 문득 자기들의 손이 둔해져서 악기를 마음대로 다룰 수 없게 되어가고 있음을 알고 놀랄 것이다. 그리고 그때 쯤엔 악기들에게도 녹이 나고 곰팡이가 잔뜩 슬어 있을 게 당연하다. 피아노는 키를 눌러도 괴상하게 식식거리기만 하고 현악기의 줄들은 늘어질 대로 늘어져 흉한 마찰음만 빚어 낸다. 악사들은 당황하여 버려 뒀던 악기들을 붙들고 우선 그것을 손질하고 굳어진 손을 다시 익혀 자신들의 소리를 되찾으려 애쓰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간신히 옛날의 소리들을 찾아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러나 이제 악사들은 무작정 연주회만 기다리고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들은 다시 소리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때때로 악기를 돌보고 손봐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세월이 또 무한정 흐른 뒤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은 어느덧 연주회에 대한 희망은 까마득히 사리지고, 오로지 악기의 소리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던 기억만을 갖게 되리라. 자기들은 연주회를 가지려는 악사임을 잊어버리고, 조율이 자신들의 본래 몫이었던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이제 이들은 조율에만 열중하고 조율에만 만족한다. 언제까지나 연주회를 갖지 못하고, 그 연주회의 꿈조차 잃어버리는 영원한 조율사들- 내가 이야기하고 싶고, 너희들에게 들려주려 한 환상이 이것이다.



                               - 이청준, <조율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