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초순이었다. 7월 중순께 울진 소광리로 내려가 사진을 찍고 있었다. 소광리는 조선 숙종 때 벌목을 금하는 황장봉표를 세워 송림을 보존한 곳이다. 60도가 넘는 경사지가 첩첩이 이어지고 원시림이 빽빽해 조금만 들어가면 방향조차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8년 전부터 매년 그곳에 두 달 정도 머물며 사진을 찍었다. 그날도 영감이 떠올라 마을 사람들과 소나무를 찾아 나섰다. 7시간쯤 올라갔을까,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능선을 올려다보니 멀리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무서울 정도였다. 커다란 호랑이 같았다. 조금 더 접근하니 숨이 막혔다.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소나무의 기운이 엄청났다. 무서워서 다가갈 수 없었다. 한 동안 혼절한 듯 멈췄다가 정신을 가다듬었다. 배낭에서 음식을 꺼내 놓고 예를 갖춘 뒤에야 가까이 갈 수 있었다. 대단한 나무들 다 봤지만 신송은 그렇게 무섭다는 느낌을 주었다.”
“대왕소나무는 경외감을 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기둥이 온통 근육질로 우락부락하다. 얼마나 척박하고 바람이 강한 곳에 있는지 둘레가 5m나 되는데 키는 9m 남짓했다. 거기에 적당한 간격을 두고 난 가지들은 용트림하듯 하늘을 향하고 있고 끝에는 늘 푸르른 솔잎들이 앉아 있다. 놀랍게도 맨 아래 가지는 연리지였다. 태백산맥서 내려오는 강한 바람과 동해의 해풍이 맞부딪쳐서 수십만 수백만 번을 스치는 동안 송진이 엉겨 두 가지가 한데 붙었다. 신이 내린 선물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겠는가. 신송(神松) 중에 신송이다.”
“프랑스 사람들이 사진을 보고는 하나같이 ‘한국에 진짜 이런 나무가 있느냐, 진짜 이런 색이냐’고 물었다. 그 사람들 우리 소나무 색깔 보고 놀라더라. 그곳에도 소나무는 있으나 모두가 검은 색이다. 우리 금강송은 껍질이 벌건데 1년 내내 이 색이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많은 내용을 함축한 게 좋은 사진이다.”
“소나무에 광솔이 있는가를 본다. 나무가 오래됐다는 증거다. 잘려나간 죽은 가지는 구도를 단순화시키며 여백의 미를 살려준다. 내 사진의 소나무는 죽은 가지가 많은 게 특징이다.”
“괴산의 왕소나무는 죽은 가지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밑동이 부러져 죽었다. 울진대왕금강송은 둘레가 5m나 되는데도 키는 10m도 안 된다. 살아남기 위해 가지를 적게 가졌다. 그런 소나무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소광리는 2274ha나 된다. 산림청에 따르면 이곳엔 200~300년 된 소나무만도 8만 그루나 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애송이다. 내가 찍는 나무들은 적어도 수령 500년 이상으로 아주 척박한 곳에서 자란다. 바위 위나 암벽 꼭대기에서 자라기에 멋이 있다. 그런 소나무만 300여 그루 이상을 봤다. 적어도 두세 아름 이상이고 키는 30m까지 된다. 내가 지금까지 확인한 게 반 정도쯤 될까. 300그루 가운데도 찍은 것은 일부이다. 소광리 밖에는 500년 이상 된 그런 소나무가 채 50그루가 안 될 것이다.”
“50~100년 뒤엔 온난화로 그 소나무들이 모두 사라질 지도 모른다. 경주 흥덕왕릉 소나무는 재선충 때문에 절반 정도를 베어내야 한다. 그러니 기록만으로도 충분히 찍을 가치가 있다.”
“소광리 산들은 60도가 넘는 경사를 기어올라야 한다. 거기 소나무들은 그래서 살아남았다. 높은 곳 척박한 곳이기에 살아남았다. 사람들이 접근 가능한 곳은 일제 때, 한국동란 때 거의 다 베어냈다. 이곳은 베어도 가져올 방도가 없어 원시림 상태로 보존됐다. 우리나라의 보배다. 세계 어디 가도 이런 곳이 없다.”
“집에서 밥 먹은 지 15년 됐다. 손님 와서 외식할 때 외엔 생식을 한다. 과일 먹고 청국장가루와 송화가루 현미가루를 타서 마신다. 물만 있으면 된다. 산에 가면 한 달씩 있다가 돌아오곤 하는데 음식을 최소화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아름다움만 표현해선 좋은 작품이 될 수 없다. 모든 대상에서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소나무에선 기상, 기운을 중시한다. 그래서 정성스레 예를 갖추고 마음을 비운 뒤 정신을 집중한다.”
“작년 겨울 한 방송사가 구정 특집으로 울진금강송 다큐멘터리를 내는데 꼭 눈 덮인 대왕금강송을 넣겠다고 했다. 그곳은 너무 험해 눈 올 때는 올라가는 게 불가능하다. 우리 집에서 10시간을 가야 한다. 그래서 눈 올 것 같은 날을 계산해 미리 올라갔다. 새벽 4시쯤 되니 텐트에 사박사박 눈 쌓이는 소리가 돌렸다. 아침부터 일어나 3일간 찍었다. 필름이며 먹을 것, 물까지 모두가 동났다. 여차하면 119에 구조요청을 하자며 내려왔다. 그런데 눈이 깊어 시간이 예상보다 많이 걸렸다. 전화도 터지지 않았다. 대왕금강송 근처에서면 겨우 연결됐던 것이다. 원래 길 없는 산인데다 눈까지 오니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저녁이 가까워지니 산봉우리만 보였다. 일행 중 젊은 친구가 조금 높은 곳에 올라가 전화를 했지만 허사였다. 모든 스태프가 나만 바라봤다. 임도 가장 높은 곳에 대놓은 차까지 가야 했다. 나는 대왕금강송을 믿었다. 나에게 사진까지 찍게 했는데 저버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몰두하니 영감이 왔다. 앞에 보이는 능선까지만 올라가자고 했다. 그곳으로 가니 갑자기 살길이 생겼다. 임도가 나타났다.
전날 저녁 먹고 아침부터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해 지옥 같았는데 이제 사는 게 확실했다. 그 길을 따라 4시간을 걸으니 차가 나왔다. 웬만큼 험한 길은 다 갈 수 있는 성능 좋은 차였다. 그런데 시동 걸고 출발하자 갑자기 차가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빠져나오려 할수록 점점 미끄러져 나중엔 길옆 나무에 가서 붙었다. 문이 다 찌그러졌다. 나와 PD만 남고 젊은 친구들에게 걸어서 내려가라고 했다. 이튿날 이장이 큰 트랙터를 몰고 왔다. 그가 “밤에 내려왔다면 다 죽었다”고 했다. 길이 온통 빙판으로 변해 트랙터조차 간신히 왔다는 것이다. 가슴이 철렁했다. 두 번이나 생사의 기로에서 빠져나온 셈이다.”
“전생에 인연이 있었나보다. 내가 사진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내 인생이 어떨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돈은 벌었을지 모르나 인생에 덕 되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예술은 영적인 세계인데 그 세계를 모르고 짐승 같은 삶을 살았을 게 아닌가.”
“신형국 선생은 보도사진 하면서 예술사진에 심취했는데 휴먼 다큐멘터리만을 고집했다. 그 분은 결정적 순간을 잡아내는데 천부적 소질이 있었다. 그 분으로부터 결정적 순간을 잡아내는 법을 배웠다. 지나고 보니 생활사진 뿐 아니라 산 사진도 결정적 순간이 있더라.”
“1989년 한중수교가 있기 3년 전 우연히 백두산 사진을 찍을 계기가 생겼다. 백두산을 처음 대하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한 장소서 꼼짝 않고 8시간이나 찍었다. 백두산에 빨려 들어갔다. 극적인 상황이 일어났다. 밤새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벅찬 감동이 넘쳤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백두산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고 열이 났다.”
“연간 반은 산에서 살았다. 텐트 치고 대피소에 머물러 결정적 순간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처음 3~5년은 헛방을 쳤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늘 헛방이었다. 산에 가서 그 순간을 못 잡으면 돌아오지 못한다. 일주일 동안 그렇게 있어도 그 순간을 못 잡으면 다음 해 다시 가야 한다.”
“처음엔 우연한 일치라고 생각했는데 그 분으로부터 백두산의 경험이 우연이 아니라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됐다. 그 스승 밑에서 공부하니 묘한 세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냥 산에 가선 만나는 게 힘든 결정적 순간을 알게 됐다.”
“상상도 못할 세계가 펼쳐지더라. 그 현상은 봐야 믿는다.”
“봉정암에서 미역국 한 그릇 얻어먹고 제자 3명과 함께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고 비가 왔다. 처음엔 부슬부슬 내리더니 나중엔 시커먼 먹구름이 끼었다. 그 순간 영감이 왔다. 지금은 들어갈 수 없는 곳인데 거길 가야 할 것 같았다. 제자 3명을 데리고 용아장성엘 갔다. 카메라가 젖으면 안 되니 봉정암 스님께 우산을 빌려갔다. 비는 점점 쏟아지고 안개는 자욱하게 끼어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전혀 가본 적도 없는 곳으로 들어갔다. 10분 정도 가다보니 이건 아닌 것 같더라. 안개 때문에 아무 것도 안 보였다. 그래서 돌아가자고 했다. 그러고 2분 정도 지나 돌이켜보니 돌아가자는 것은 내 생각이었고 된다는 것은 하늘에서 온 영감이었다. 언뜻 내 생각이 아니라 영감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가자고 했다. 조금 가니 겨우 카메라 한 대 설치할 수 있는 바위가 나타났다. 거기에 카메라 설치하고 우산으로 가리고 있는데 5분도 안 돼 갑자기 앞이 확 펼쳐졌다. 기적 같은 장면이 나타났다.”
“이 카메라를 쓰려면 15분 전에 알아야 한다. (설치하고 준비하는 데 그만큼 시간이 걸린다) 15분 전 예측해야만 결정적 순간을 잡아낼 수 있다. 그걸 수없이 연습하다보니 하루 이틀로 늘어나고 그걸 확대하니 10년 20년을 보게 됐다.”
“집중이 잘 될 때는 여기 앉아서 한라산과 지리산의 변화가 보인다. 그럴 때 거기 있는 사람에게 전화해서 빨리 찍으라고 하면 어떻게 아느냐고 깜짝 놀란다.”
“소광리에선 새벽 2~3시면 일어난다. 주로 여름에 작업하는데 소나무가 가장 왕성할 때다. 그곳에 가면 땅기운이 워낙 좋아 잠을 안자도 된다. 그 때가 되면 눈이 떠져 일어난다. 산 사진 찍으며 터득한 영감이 있다. 영감은 하늘의 파장이 맞아야 온다.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면 파장이 온다. 그 뒤 소나무를 찾아 나선다.”
“예술은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신들림의 경지까지 가야 한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대작까지는 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시공을 초월해 감흥을 주지는 못한다. 불후의 명작은 신들림의 경지가 되어야 한다.”
“17년간 1년의 절반 이상을 산속에서 살며 산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소나무로 전향한 후 앞이 캄캄했다. 나중에야 감을 터득했다. 소나무는 햇빛의 각도와 강약, 계절 시간대에 따라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햇빛 없는 곳에서 농담을 표현한다.”
“소나무의 맑은 기운이 내 안의 탁한 기운을 몰아낸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 같다. 재작년보다 작년이 좋아졌고 작년보다 올해가 좋아졌다. 그곳에 머물면서 병이며 피로가 없어졌다.”
“사진 찍으며 건강 찾았고, 절대 무한의 행복을 찾았으며, 예술까지 하니 천하를 얻은 것 같다. 사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다.”
“집중력 키우는 데 사진 이상 가는 게 없다. 사람 사는 게 마음먹기 달렸다는데 사진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1초에 승부를 내야 한다. 그 집중력이 모이면 기운이 된다. 마음먹은 게 현실세계 물질세계로 나타난다.”
“경제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 진정한 의미의 행복이 무엇인지 아나. 진정한 행복은 마음을 비웠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돈으로 사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만족이다. 그 만족감은 수시로 변한다. 한국 최고 부자라고 그걸로 만족할 수 있나. 이에 비해 진정한 행복은 변하지 않는다. 내 안에 소나무 기운을 채우면 나와 소나무가 일체가 된다. 그게 행복이다. 내가 소나무를 좋아하고 소나무 작가이니 소나무 기운을 채우면 된다.”
“내가 찍고 싶은 것은 정기요 기상이다. 그래서 산의 기, 소나무의 기를 찍었다. 그걸 다른 사람이 느꼈다면 성공한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내가 잘못했거나 아니면 상대가 짐승 같아서 느끼지 못하는 거다. 내 사진 본 화가들이 눈물을 흘리거나 무서워서 다가가지 못하겠다고 하니 이러면 된 게 아닌가.”
+ 출처: 매일경제 Luxmen 제39호(2013년 12월) 중에서 부분 발췌
+ 주소: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4&oid=009&aid=0003095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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