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 홍련>의 제목을 붙여보자. 김지운 감독의 영화 <장화, 홍련>의 제목을 영어로는 어떻게 표현할까? 다음과 같은 상황을 설정해 보자. <장화, 홍련>을 최고 권위의 영화제 ‘OO 영화제’에 출품하려고 하는데, 당연하겠지만 영어제목이 필요하다. 영화사 직원들과 스탭들 모두 머리를 맞대고 밤을 새우며 어떤 제목을 붙여야 영화의 내용을 가장 잘 반영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 중이다. 여러분들이 그 일원이라고 가정하고 직접 좋은 아이디어를 내어보자.
학교 다닐 때 '관사'라면 치를 떨었던 ‘장수백반’ 영화사의 김영미 홍보팀장. 영화 마케팅 분야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영어, 특히 ‘관사’는 평생 만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지금 그놈의 관사 때문에 미칠 지경이다. 아닌 것 같지만 실제 장화 홍련의 영어제목은 '관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여하튼 48시간 마라톤 난상토론을 한 결과 아래와 같은 후보 제목들이 쏟아져 나왔다.
1) A TALE OF TWO SISTERS
2) THE TALE OF TWO SISTERS
3) A TALE OF THE SISTERS
4) THE TALE OF THE SISTERS
5) A TALE OF THE TWO SISTERS
6) THE TALE OF THE TWO SISTERS
7) TALE OF TWO SISTERS
8) TALE OF THE TWO SISTERS
9) TALE OF THE SISTERS
1)번 제목은 실제 <장화, 홍련>의 영어제목(A tale of two sisters)이기도 하다. 우리말로 옮기면 <두 자매 이야기>, <어느 두 자매 이야기> 정도 될까. 물론 2)번 지문과 같이 the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우리들이 배운 관사 이론대로라면 정관사 the 가 오히려 더 이해하기 쉽다. 왜냐. 장화와 홍련이라는 피가 다른 두 남매의 아주 특별한 이야기가 바로 영화 <장화, 홍련>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The tale of two sisters> 라고 표현해도 아무런 문제없다. 하지만 두 표현 사이에 분명 뉘앙스 차이는 존재한다. 이것은 결코 ‘정답’과 ‘완벽한 설명’을 요하는 문제가 아니다. 만약 위와 같은 9개의 보기 중에서 그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택해야 할까. 당연히 정답은 없다. 어떤 제목을 붙일지는 결정권자(감독이나 제작자)의 마음이다. 김지운 감독(아니면 영화사 책임자)은 1)번을 선택했을 뿐이다. 만약 이 영화를 본 어떤 관객은 7)번 제목이 더 와 닿을 지도 모를 일이다. 마치 마이클 잭슨의 사망 소식을 보도한 미국 언론매체들의 각기 다른 제목 선정과 같이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에서 정해지게 된다. 물론 관사에 대해 전혀 개념이 잡혀 있지 않으면 1)번부터 9)번까지 모든 제목이 똑같은 의미가 아니냐고 반문하겠지만.
참고로 헨리 제임스의 소설 <여인의 초상>의 원제목은 <The portrait of a lady> 이다. 만약 A portrait of a lady 이라고 제목을 붙였다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직접 한번 음미해 보자. 그리고 이 원제목을 우리말로 옮긴다면 뭐라고 제목을 정하고 싶은지. 일반적으로 <어느 여인의 초상>으로 번역되어 우리에게 알려진 ‘미셸 비나베르’의 책 <Portrait d'une femme>의 영문판 제목은 <Portrait of a Woman> 이다. 다른 듯 하면서도 같은, 같은 듯 하면서도 다른 관사의 존재를 비교 체험할 수 있는 두 개의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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