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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책-문재인 두 경희대 법대 출신 이야기


한번씩 그런 생각을 해 본다. 문재인, 전원책 두 경희대 법대 동문은 서로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다 볼까. 단순히 <위키페디아> 자료만 놓고 보자면 둘은 한 강의실에서 같이 수업 들었을 가능성은 (사실상) 없었지 싶다. 하지만 법조계에선 변방(별다른 뜻은 없고, 그냥 SKY 만큼의 다수 인맥은 아니라서)이라 할 수 있는 경희대 법대(법학과) 출신이기에 '법조계 내 소수자'이자 대학 동문으로 '연대감'같은 없을까. 두 사람이 지금까지 그려온, 그리고 현재 그리고 있는  정치적 스펙트럼으로 봐서는 그다지 친할 것 같지는 않은데.. 게다가 둘은 부산의 양대 라이벌이라는 명문 '경남고'와 '부산고'란 간판을 뒤에 달고 있기에...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든다. (경남고-부산고 , 또는 부산고-경남고 '라이버리'.. 롯데 자이언츠 내 선수들간 통합과 소통(?)을 방해하는 주범으로 이따금씩 도마에 오르는 녀석 아닌가. 오죽 했으면 로떼가 8888 비밀번호를 찍었던 이유 중 하나가 두 고교출신 선수들간 불화때문이었다는 말이 나돌았겠는가.)



전원책과 문재인, 아무튼 두 사람은 2013년 전후로 이땅 위에서 가장 '핫'한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닐까나. 전자는 12월 대선에서 제 1야당 대통령 후보가 되어 1400만표를 얻은 역대 최다득표 낙선자, 그러나 언제 '다음'을 품을 지 알 수 정치인, 다른 한 사람은 요즘 가장 잘 나가는 보수논객 중 1인으로 여기저기 얼굴을 내밀고 있는 바쁘신 몸. 공중파 김정일 욕설 방송사고도 그의 입을 잠재우지는 못하니. 본업인 변호사 업무는 제외하고서 말이다. 아울러 전원책의 부업이라 할 수 있는 문학활동도 당연히 열외.(전원책은 1977년도 백만원고료 한국문학신인상으로 등단, 1990년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재등단한 이색적인 이력의 소유자다. 그의 홈피를 들어서면 정치인의 홈피가 아닌 시인의 마을에 온 느낌.)



문재인은 1953년 1월 24일생, 전원책은 1955년 1월 8일 생으로, 둘의 나이는 2년 차이가 난다. 하지만 문재인이 경남고 졸업 후 재수 끝에 72학번으로 경희대 법대에 입학한 반면, 전원책은 부산고 졸업 후 약 3년 재야(?)에 몸담고 있다 뒤늦게 1975년 75학번으로 경희대 법학과에 입학하게 됨에 따라 둘의 학번 차이는 나이차 보다 많은 3년이 나게 된다. 전원책의 말(엄밀히 말해 홈페이지에 소개된 그의 프로필 일부)을 빌리면 고교 졸업 후 낭인생활을 계속하는 가운데, 루쏘, 키에르케고르, 칸트 등의 근대철학을 탐닉했고 종로2가 관철동을 근거로 많은 낭인들과 교유하느라 75년이 되어서야 입학했다고. @@

 

 

전원책이 75년도 3월에 입학해서 군법무관으로 입대 전까지 4년 연속 학교를 다닌 반면, 문재인은 재학 시절 운동권으로서 당시 총학생회장이던 강삼재(이 얼마나 반가운(?) 이름이냐. 당시 강삼재는 신문방송학과 재학)를 대신하여 총학생회 총무부장로서 집회를 주도하다가 1975년 4월 11일 집회 때 구속되어 그 해 6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8월 집행 유예 1년을 선고받고 경희대에서 제적당하게 된다. 이로써 문재인과 전원책이 만날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까. 전원책이 입학한 후 약 한달 뒤 문재인이 구속되면서 둘이 함께 같은 강의실에서 수강이 가능했던 기간은 그 한달여가 전부인데 둘이서 얼마나 말을 섞었는지는 미지수다. 거기에 대부분의 대학에서 가장 모집단위가 큰 학과 중 하나인 법학과 소속 아닌가. 같은 학번끼리도 얼굴 익히기가 힘들다는.(참고로 제적 후 문재인은 제적 후 문재인은 강제 징집되어 1975년 8월 육군에 입대, 제1공수 특전여단 제3대대에서 특전병으로 복무하게 된다. 그 뒤로 그는 학교에 돌아오지 않았다.)



+ 아래 자료출처: 인터넷


+ 문재인 프로필

학창 시절

부산남항초등학교와 경남중학교,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 끝에 예비고사 후기로 4년 장학금을 받아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에 72학번으로 입학했다.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재학 시절 운동권으로서 총학생회장이던 강삼재를 대신하여 당시 총학생회 총무부장로서 집회를 주도하다가 1975년 4월 11일 집회 때 구속되어 그 해 6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8월 집행 유예 1년을 선고받고 경희대에서 제적당했다. 출소 후 강제 징집되어 1975년 8월 육군에 입대하였고 대한민국 39향토보병사단 훈련소를 거쳐 특수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 특전여단 제3대대에서 특전병으로 근무했다. UDT로 복무했다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으나, UDT는 해군 소속이기 때문에 육군소속 특수전사령부와는 관계가 없다.


사회 생활

제대 후 2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80년 5월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가 내려지면서 실시된 예비 검속으로 체포되어, 사법시험 합격 통지서는 청량리 경찰서 유치장에서 받았다. 1982년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했으나 시위 전력 때문에 판사 임용이 좌절되었고, 노무현과 사법시험 동기인 박정규(노무현 정부 시절 민정수석 역임)의 소개로 노무현을 만나 법무법인 부산에 합류했다. 법무법인 부산에서 노무현과 인연을 맺은 것을 계기로 30년 가까이 가장 친한 친구이자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노무현이 정계에 입문하여 청문회 스타가 된 뒤에도 부산변호사협회 인권 위원장을 지내면서 인권 변호사로 일했으며 부림사건,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동의대학교 사건 등 굵직한 시국사건을 변론했다. 그는 1996년 8월 발생한 페스카마호 사건에서 한국인 선원 11명을 살해한 조선족 선원들의 변호를 맡았다. 한겨레신문 설립 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문재인은 무료로 변론하게 되면 자칫 사건 당사자와 가족들이 재판을 경시하는 풍조가 나타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무료 변론은 하지 않았는데, 경상대학교 교수들이 《한국사회의 이해》라는 저서를 강의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자 5년 간 변론을 맡아 항소심에서 승소했을 때 고작 1백만∼2백만원대의 수수료를 받기도 했다





전원책(全元策, 1955년 1월 8일 ~ )은 부산중고와 경희대 법대 등에서 수학했다. 1977년도 백만원고료 한국문학신인상으로 등단하였으나 3년 뒤에 시작을 중단했다. 1990년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재등단하였

고 시집으로 '슬픔에 관한 견해'와 2000부 한정판 '수련의 집'을 상재했다. 1995년 경희대 법대에서 강사로 '법과 문학'을 가르치다 겸임교수로 '법과 예술'을 강의했으며, 이 무렵부터 여러 방송사의 토론 패널로 출연해왔다. 현재는 '지식인 비판'에 이어 '좌파비판'을 쓰면서, KBS1 라디오 '열린토론' 고정출연을 비롯해 여러 지상파, 종편 토론프로그램과 시사프로그램에 나서고 있다. 현재 자유경제원장으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주의 홍보, 계몽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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