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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이야기/열린 영문법

‘관사’를 모르면 싸움난다.

‘관사’를 모르면 싸움난다. 주희와 세희. 둘은 서로를 향해 ‘제거대상 1호’라고 부르는 사이. 주위로부터 ‘레즈비언’이 아니냐는 추측을 불러일으킬 만큼 절친하다. H모 물산 대리 김대현씨와 S모 물산 과장 이대발씨. 두 노총각은 주희와 세희의 ‘남자친구’란 신분증을 소지하고 있지만, 늘 ‘여분(spare)’로 존재한다. 즉 주희와 세희, 단 둘이서 쇼핑이라도 하는 날에는 이들은 집에서 조용히 그녀들의 호출을 기다리고 있어야만 한다. 


모처럼 찾아온 대현이와 주희의 모처럼만의 데이트에 아니나 다를까, 세희가 끼어들면서 결국 셋이서 이야기꽃을 피우게 된다. 손님격인 세희가 사실상 대화를 주도하며, 자신의 남자친구(대발) 뒷담화를 하면서 두 시간이 넘도록 쉴 새 없이 얘기한다. 그녀의 ‘분노’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둘 사이(대발-세희)에 전화 통화는 3분을 넘기지 못한다.”는 내용. 대화가 부족하단다. 여하튼 두 사람은 사귄지 1년을 향해 가고 있다. 그렇게 이야기꽃을 피우던 중 밤 11시가 넘어 대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고객 접대를 끝내고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장난기가 발동한 세희는 “아는 오빠와 술 한 잔하고 있다.”며 대발을 자극하게 된다. 질투심이 강하고 ‘욱’하는 성격이 있는 대발씨의 성격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 불같은 성격을 이용해서 한번 놀려주려고 한 것이다. 자극도 좀 줄 겸. 여기에 화답한 대현씨는 세희의 전화기를 향해 “전화 당장 끊고 오빠랑 술이나 마시자!”하면서 큰 소리로 외친다. 이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발끈한 이대발씨는 그 오빠 당장 바꾸라며 화를 내기 시작한다. 이제 대현씨가 전화를 받아 “아는 여동생이랑 술 한 잔 하는 게 어때서요?”하면서 더 강도를 높이게 되고, 다시 대현이의 여자 친구 ‘주희’가 전화를 넘겨받자, 대발은 “그 남자 누구요? 당신은 또 누구지요?”하면서 물었단다. 여기에 주희가 “남자친구에요.”라는 말을 전달하게 된다. 이 말이 전화선을 타고 대발의 귀에 전달되는 순간 장난으로 시작된 ‘연극’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야 말았다. 여기서 주희의 말을 영어로 옮겨보자.


He is a boyfriend. 


주희의 원래 의도는 “그 남자 제 남자친구에요.(He is my boyfriend)”이지만 여기서 소유격(소유형용사) my를 사용하지 않고, 일부러 부정관사를 넣어서 a boyfriend라고 표현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이대발씨는 (모든 상황을 고려해 볼 때) a boyfriend는 사실상 자신의 여자 친구인 세희와 밤늦게 술 한 잔하고 있다는 그 남자이며, 그가 세희의 (또 다른) 남자친구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위 일화에서 보듯, 부정관사(a)는 boyfriend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끄집어내는 역할은 하지만, 그 대상을 구체화시켜주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주희의 남자친구’라는 구체적인 대상으로 범위를 좁혀줄 수는 없다. 오늘도 “고왔던 순이, 순이야~”를 목 놓아 있는 부르고 있는 바보 같은 오빠 동철이, 민정이를 매일 울리고 있는 나쁜 오빠 용발이를 포함해서 지구상의 모든 오빠(남자 친구)들이 a boyfriend라는 그 카테고리 속에 담기게 된다. 당연히 대발씨도, 대현씨도, 모두 누군가의 남자친구이기에 그 그룹에 싫든 좋든 들어가게 된다. 


주희가 말한 “남자친구”라는 표현은 대발의 불편한 심기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어버렸다. 중요한 고객과의 2차, 3차 약속도 포기하고 택시를 타고 한 시간이나 되는 장소에 기꺼이 도착한 대발. 이 모든 분란의 원인이 바로 ‘관사’하나 때문이다. a라는 부정관사 녀석이 주범인 것은 불문가지. 따라서 주희가 처음부터 대현이의 정체를 He is my boyfriend.라고 못 박아 주었다면 대발이 눈치를 챘는지도 모른다. 간간히 터지는 웃음소리 속에서 왠지 ‘설정’의 냄새가 난다고. 하지만 이미 술에 만취한 데다 부정관사가 들어간 표현(He is a boyfriend)이 주는 모호성과 불확정성 때문에 대발은 전혀 그 연극을 눈치 채지 못하고 대현이에게 전치 8주의 선물을 안겨주고서야 말았다는 에피소드. 대현이의 살신성인 자세로 세희는 남친 이대발씨의 그 질투심에 한편으로 감동했다는 훈훈한 이야기가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