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인장 메뉴/스페셜 에디션

이미지로 보는 미국의 역대 대통령, 연설문









영어방송을 시청하던 중, 흥미로운 내용이 있어서 한번 캡쳐해 봤습니다. 이름하여 <역대 미국 대통령 얼굴 변천사> 그냥 해당 대통령에 대한 정보보다는 사진을 감상하는데 초점을 두고 읽으시기 바랍니다. 루즈벨트(FDR)의 경우엔 취임시와 퇴임시 얼굴모습이 가장 많이 변한 것 같더군요. 아마도 12년 집권하는 동안 대공황, 2차 세계대전을 겪다 보니 그만큼 육체적, 심적인 고생도 심했나 봅니다. 개별 신상정보는 <위키페디아> 한국판에 실린 내용을‘소스’로 하고 있으며, 위키에서 부족한 부분은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가져왔습니다. 아직도 평가가 진행 중이거나, 그 업적을 평가하는 데 있어 논란이 많은 경우도 있는 관계로, 아래 신상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금물입니다. 예를 들어, 케네디 같은 경우 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의 공격을 받은 배 속에서 자신의 동료를 구한 영웅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일각에서는 그 당시 케네디가 보트 한 구석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FDR(루즈벨트)의 뉴딜정책이 정말 경제정책으로 성공적인 작품이었느냐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상존합니다. 미국경제(대공황)를 살린 것은 뉴딜정책이 아니라, 바로 2차대전, 즉 전쟁이라고 하지요.  


 

 

참고로 대통령 인물정보 아래에 있는 이미지는 해당 대통령 취임사에 포함된 단어들을 출현빈도순으로 추출해서 시각화시킨 것입니다. 취임사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들이 상대적으로 크고 굵게 보입니다. 장문의 대통령 취임사를 열심히 읽고 해석하는 것 보다, 때론 그 글을 구성하고 있는 개별 단어들의 출현빈도를 살펴보면 해당 연설문 속에 담긴 메세지를 보다 감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프칸과 이라크를 상대로 힘겨운 전쟁을 벌이고 있던 부시는 2005년 freedom, liberty 두 단어를 가지고서 자신의 취임사를 장식합니다. 2001년 처음 대통령 선서를 할 때는 보이지 않았던 단어들입니다. 2차대전과 한국전쟁의 그림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던 1960년대는 미국 사회 내부적으로 인권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시기였습니다. 케네디의 뒤를 이은 린든 존슨의 취임 연설문에는 이러한 변화의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한 '변화(change)'가 단연 돋보입니다. 오바마가 목이 아프도록 외치고 다녔던 change 는 정작 오바마의 취임사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남북전쟁 당시 최고사령관이던 링컨은 '전쟁(war)'을 통해 남과 북이 처절하게 대립하고 있던 당시의 미국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케네디의 경우 유안히 Let 동사를 많이 언급한 것도 이색적입니다.


 


☞ 참고사항: 루즈벨트, 부시, 클린턴 등과 같이 재선 이상을 기록한 대통령의 경우 전체 취임사 중에서 하나만 가져왔습니다. 예를 들어, 조지 W. 부시는 2001년, 2005년 두번의 취임연설을 했는데 그중 2005년 취임사가 아래에 나와 있습니다.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년1월 30일 ~ 1945년4월 12일)는 미국의 제32대 대통령(재임 1933년 ~ 1945년)이다. 그는 임기 동안 대공황과 제2차 세계 대전을 모두 경험한, 20세기의 중심인물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루스벨트의 리더쉽은 뉴딜 정책을 통하여 미국이 대공황에서 벗어나도록 도왔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때 연합군에 동참하여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 그리고 일본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하여 승리로 이끌었다. 그렇지만 스탈린에 대한 미묘한 자세는 이후 역사가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 조직에 대한 그의 열망은 사후에 국제 연합의 결성으로써 결실을 맺게 되었다. 미국의 대통령 중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통령직에 네 번이나 당선되어 12년간 백악관을 차지했던 장기 집권자이기도 하다. 또, 미국인들에게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면 상위에 위치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 1884년 5월 8일~1972년 12월 26일)은 미국의 제34대 부통령(1945년), 제33대 대통령(1945년 4월 12일~1953년)이었다. 이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부통령이 된 지 불과 82일 만에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그는 1919년, 베스 트루먼과 결혼하고, 남성복 가게를 열었으나 3년이 못 가 망했단다. 하지만 아내와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였다. 그 뒤, 정치계에 투신하여 1934년까지 판사로 봉사하였고, 연방 상원의원의 길을 열었다. 1945년 8월, 그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하였고,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서 제2차 세계 대전은 완전히 끝나게 되었지만, 원자탄 투하는 두고두고 역사의 비판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당시 일본은 사실상 전쟁수행능력을 상실하여, 원자폭탄을 굳이 쓰지 않더라도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었으며, 원자탄 투하로 인한 참상이 잔혹했기 때문이다. 














드와이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애칭: 아이크, IKE, 1890년 11월 14일 - 1969년 3월 28일)는 미국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미국의 제34대 대통령이다. 


독일에서 이주한 메노나이트신도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비폭력주의가 특징인 메노나이트 교회의 독실한 신도였지만, 아들의 뜻을 존중하여 군인을 양성하는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입학을 허락했다. 1915년에 미국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성적은 평범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연합군최고사령관으로 재직하였다. 당시 미군에 대한 불신을 숨기지 않았던 영국군과 그런 영국군을 고깝게 여긴 미군 지휘관들 사이에서 중재자로 활약하였고, 그에 대한 평가도 전투 지휘관보다는 대기업의 총수같다는 평이 많았다. 유럽 전선에 파견된 후 최초로 지휘한 작전은 미군과 영국군으로 구성된 연합부대로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토오치작전이었으며, 이후 서방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서 노르망디 상륙작전(1944년 6월 6일)을 지휘하였다. 전쟁 중에 '아이크'란 별칭으로 줄곧 불렸다. 


1952년에는 오랜 민주당 대통령 시대를 마감하고 20년만에 공화당으로서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한국전쟁 휴전조약을 이끌어냈다. 이는 그의 선거공약으로 선거운동 당시 한국전쟁 장기화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하여 '제가 한국에 가겠습니다' 라는 말을 남겼으며, 실제로 당선 직후 한국을 방문하였다. 1956년에 재선되었고, 1960년에 다시 한국을 방문하였다. 1960년의 방문은 미국의 대통령 신분으로는 최초의 방문이었다. 


1969년 3월 28일 심장병으로 사망하였다. 


 





 






존 피츠제럴드 "잭" 케네디(John Fitzgerald "Jack" Kennedy, 1917년 5월 29일~1963년 11월 22일)는 미국의 제 35대 대통령이자, 미국 대통령 중에서 유일한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라는 점과 상류사회에서 잉글랜드계에 밀리던 아일랜드계 혈통 때문에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반발과 논쟁을 불러온 인물이다.[1] 그는 1961년부터 1963년에 암살당하기까지 겨우 2년 동안 대통령직에 있었지만 미국의 자유주의에 대한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남태평양에서 PT-109 고속 어뢰정의 해군 장교로 근무했는데, 자신의 배가 일본군에게 격침되자 위협을 무릅쓰고 동료를 구한 것으로 영웅이 되었다. 케네디는 1946년부터 1960년까지 미 의회에 있었으며, 1960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케네디는 대통령직에 고작 2년밖에 있지 않았지만, 그의 임기 동안에 피그만 침공, 쿠바 미사일 위기, 베를린 장벽, 우주 경쟁, 베트남 전쟁 간접 개입, 미국 민권 운동 등 많은 일이 일어났었다. 서투른 명문가 도련님이라는 우려도 받았으나 역사가들은 케네디를 링컨, 루즈벨트, 워싱턴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 가만히 살펴 보면 가르마?의 방향이 바뀌었나?










 


 


린든 베인스 존슨(Lyndon Baines Johnson, 1908년 8월 27일 - 1973년 1월 22일)은 미국의 제 36대 대통령이다. 1937년 이후 오랫동안 텍사스에서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48년에는 상원 의원이 되었다. 


1963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케네디 후보에게 패배하였으나 케네디 정부의 부통령이 되었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 이후 그의 임기를 이어 받아 대통령이 되었고 1964년 재선 되었다. 1968년 두 번 이상 출마하지 않겠다는 발표를 하고 부통령이던 험프리를 밀었으나 공화당의 닉슨에게 지고 말았다. 그는 '위대한 사회' 건설을 주장했으나, 월남 전쟁에서는 사태의 심각화를 초래하였다. 


 











리처드 밀하우스 닉슨(Richard Milhous Nixon, 1913년 1월 9일 - 1994년 4월 22일)은 미국의 제37대 대통령이다.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근처의 넉넉하지 못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하버드 대학교 입학 허가를 받았으나, 집안의 경제적인 사정으로 동부로 진학하는 것을 단념하고 캘리포니아 주의 휘티어 대학교에 들어갔다. 다시 동부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있는 듀크 대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게 되어, 법학대학원을 마치고 변호사 자격증을 얻고 고향 캘리포니아 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유능한 변호사로 활동하였고,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1946년 연방 하원 의원 선거에 도전하여 당선되었고, 1950년에는 연방 상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불과 39세의 나이로 아이젠하워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부통령이 되었고, 1956년 재선되었다. 1960년에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민주당의 존 F. 케네디와 치열한 접전 끝에 패하였다. 1962년 캘리포니아 주 주지사 선거에 도전하였으나, 민주당 후보에게 패하였다. 그 후 정계에서 잠시 물러나 뉴욕으로 이주하였다. 1968년 다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대통령에 당선되어, 1969년 미국 제 37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69년 "아시아 각국은 내란이 발생하거나 침략을 받는 경우 스스로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였다. 1971년 7월 9일 보좌관 헨리 키신저와 함께 중국과의 관계 회복을 시도하기 위해 비밀리에 파키스탄 항공편으로 베이징을 방문했다. 


1972년 선거에서 그는 민주당의 조지 S. 맥거번을 상대로 매사추세츠 주를 제외한 49개 주에서 승리하며 재선되었다. 이 빛나는 승리는 워터게이트 사건에 발목이 잡혀 임기 중 사퇴라는 치욕적인 결말을 맺고 만다. 


 





 






제럴드 루돌프 포드(Gerald Rudolph Ford, Jr. 1913년 7월 14일 ~ 2006년 12월 26일)는 미국의 제38대 대통령이다. 그는 선거에 의해 대통령이나 부통령으로 선출된 적이 없이 대통령직을 수행한 유일한 대통령이다. 1973년 스피로 애그뉴가 부통령을 사임함에 따라 리처드 닉슨에 의해 지명되었고 미국 하원에 의해 승인되었다. 그리고 리처드 닉슨이 1974년 8월 9일 사임함에 따라서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2006년 11월을 기점으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93세 120일이라는 나이기록을 갱신하고 현존 가장 장수하는 대통령이 되었으며, 다음 달인 12월에 사망했다.  


 









지미 카터(Jimmy Carter, 본명 James Earl Carter, Junior., 1924년 10월 1일 ~ )는 민주당 출신 미국 제 39 대 대통령(1977년 ~ 1981년)이다. 


조지아 주 섬터 카운티, 플레인스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조지아 공과대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 메릴랜드 주에 있는 아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United States Naval Academy)를 졸업하였다. 그 후 해군에 들어가 전함·원자력·잠수함의 승무원으로 일하였다. 1953년 제대하고 땅콩·면화 등을 가꿔 많은 돈을 벌었다. 1962년 조지아 주 상원 의원에 당선되고, 1970년 조지아 주 지사에 뽑혔다. 1976년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인권 존중을 기본 정책으로 내세워, 포드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미군 철수 문제로 한때 한미 관계가 불편하기도 하였다. 


대통령이 되기 전 조지아 주 상원의원을 두 번 연임하였으며, 1971년부터 1975년까지 조지아 주 주지사로 근무하였다. 


또한 북한의 위협에 대비해 1978년 한미연합사를 창설했다. 1977년 취임한 카터 대통령은 1978년∼1982년 3단계에 걸쳐 주한미군과 핵무기를 완전 철수키로 하고 대신 한미연합사를 만들기로 했다. 그러나 주한미군사령부와 정보기관·의회의 반대에 부딪쳐 주한미군은 완전철수 대신 6000명을 감축하는 데 그쳤다. 


취임 이후 카터는 계속해서 도덕정치를 내세웠으나 계속되는 미국내 경제불황으로 국민의 선택을 받지못하여 1979년,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후보에게 압도적인 표차로 뒤져 결국 재선에 실패하였다. 


1차 북핵위기 당시 북한을 방문하여 미국과 북한의 중재에 큰 기여를 했다. 미국의 북한에 대한 군사행동이 임박한 시기였다. 경제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이란 사태에 발목이 잡혀 실패한 대통령으로 평가를 받지만, 사실상 이란 사태는 카터가 해결한 것이었고, 사랑의 집짓기 운동 등으로 퇴임 후에 더 존경받는 특이한 인물로 남았다. 


인권과 중재역에 대한 공로로, 2002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로널드 윌슨 레이건 (Ronald Wilson Reagan, 1911년 2월 6일 ~ 2004년 6월 5일)은 미국의 제 40대 (1981년 ~ 1989년) 대통령과 33대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낸 정치인이다. 


1911년, 일리노이주 탐피코에서 태어났으며 1932년 유레카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아나운서로 일하였다. 1937년 할리우드에 들어가 1964년까지 《Kings Row》(1942년) 등 약 50편의 영화에 출연하였으나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1947년 미국노동총연맹 산하 영화배우협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처음에는 민주당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지지하였으나, 1950년대 초부터 차츰 보수적 입장으로 기울어졌다. 1949년에는 제인 와이먼과 이혼하였고 3년 뒤인 1952년에 낸시 데이비스와 재혼하였다. 


1962년, 공화당에 가입하였고 1966년에는 캘리포니아주의 주지사로 당선되어 조세감면, 복지제도의 확대, 고등교육정책에 힘을 쏟았고 캘리포니아주의 재정을 적자에서 흑자로 바꾸었다. 이때의 레이건은 강경한 보수주의 입장을 드러냈으며 1976년 공화당 대통령후보지명대회에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제럴드 포드에게 패하였으나 1980년에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어 경제불황으로 인기가 추락했던 당시 민주당의 대통령 지미 카터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제40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81년 3월에는 힐튼 호텔에서 노동계 지도자들과 오찬을 마치고 떠나던 도중 정신병자였던 존 힝클리(John Hinckley)에게 저격을 당했으나 총알이 심장에서 12cm 떨어진 곳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하여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테쿰세의 저주를 피해간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이 저격사건으로 인해 경호원이었던 팀 매카시(Tim Mccathy)가 사망하였다. 


당시 존 힝클리는 범행 이유에 대해 '당시 유명 영화배우였던 조디 포스터(Alicia Christian Foster)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고 범행 이유를 자백하였고 정신병을 앓고 있었던 사실이 정상참작되어 1982년, 무죄판결을 받고 세인트 엘리자베스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보수적이고 강경한 국내외정책을 펼쳐 1984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월터 먼데일에게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조세감면과 사회복지지출을 억제한 ‘레이거노믹스’의 결과 재정 및 무역 적자를 초래하였고 대외정책에서 레바논 파병과 리비아 폭격, 그레나다 침공, 니카라과 반군지원 등으로 제3세계 국가들에게 위협을 주었고 포클랜드 전쟁에서는 우방국인 영국을 옹호하였으며 아르헨티나를 테러집단으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1986년 '이란 - 콘트라 사건'으로 인기가 떨어지자 소비에트 연방에 대해 유화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1987년 12월에는 러시아의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중거리핵전력폐기조약'(INF Treaty)을 맺어 냉전을 종식시켰고 1988년 대통령선거에서는 부통령이었던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를 도와 공화당 재집권에 성공하였으며 1989년에 퇴임하였다. 


그는 공화당을 더욱 강경한 보수주의로 이끌었던 미국 보수주의운동 진영에서 배출한 최초의 대통령으로 미국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많은 나이인 70세의 나이로 취임한 대통령이었으며 역대 대통령 중 최초로 이혼 경력이 있는 대통령이기도 하였다. 그 후, 퇴임한지 5년이 지난 1994년 11월, 알츠하이머병 초기 진단을 받고 10년간 투병해 온 그는 2004년 6월 5일 캘리포니아 자택에서 9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2007년, 갤럽(Gallup)의 여론조사에서는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으로 루즈벨트 대통령과 케네디 대통령의 뒤를 이어 59%를 득표하며 3위를 기록하였다.



 





 


 


  




 

조지 H. W. BUSH (재임기간: 1989년 - 1993년) 매사추세츠주(州) 밀턴에서 출생했다. 예일대학교 재학 중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1942∼1945년 항공모함 탑재 뇌격기 조종사로 종군하였고, 1948년 예일대학교 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1953년 자파타석유회사를, 1954년 자파타원양회사를 공동창설, 이사장으로 있었고, 1959년 공화당에 입당하여 1964년 상원의원선거에 출마하였다가 낙선한 후 1966년 텍사스주(州) 제7구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70∼1973년 국제연합 주재 대사, 1974∼1975년 국무성 베이징[北京]연락사무소 소장으로서 대(對)중국과의 국교정상화에 힘썼으며 1976∼1977년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지냈다. 1980년, 1984년 대통령선거에서 R.W.레이건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하여 두 차례 부통령을 지냈으며, 1988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듀카키스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89년 제4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 후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B.클린턴에게 패하여 재선에 실패하였다. 1982년, 1989년, 1992년, 2001년 한국을 방문하였다. 















 


Bill Clinton (재임기간: 1993년 - 2001년) 본명은 William Jefferson Blythe IV이며, 아칸소주(州) 호프에서 태어났다. 유복자로 태어나 결손가정에서 소년시절을 보내고, 15세 때 아칸소주의 우수학생으로 뽑혀 백악관을 방문, 대통령 J.F.케네디와 악수하는 기회를 가짐으로써 정치가가 될 결심을 하였다. 1968년 조지타운대학을 졸업, 이어 2년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로즈(Rhodes) 장학생으로 유학하였으며, 그후 예일대학교 법학대학원에 입학, 졸업과 동시에 아칸소대학 법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1972년과 1976년 대통령선거 때 민주당후보인 G.맥거번과 J.카터의 선거운동을 지휘하였다. 1976년 아칸소주 법무장관이 되었으며, 1978년 32세에 미국 최연소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민주당 우파에 소속되어 1992년 현직 대통령 G.H.W.부시를 누르고 제42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사상 3 번째로 젊은 46세의 대통령이 되었다. 전후(戰後)세대로서 최강의 군사력과 적극적인 경제정책으로 미국을 새롭게 탄생시킨다는 노선을 지향하면서 1993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96년 4월 한국의 제주도를 방문, 대통령 김영삼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1997년 12월 백악관 여직원이던 르윈스키와의 성추문 사건이 공개되어 큰 파문을 일으켰다. 1998년 10월, 하원은 클린턴에 대한 탄핵조사안을 가결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탄핵안도 가결하였다. 그러나 1999년 탄핵소추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실용적인 경제 및 대외정책에 크게 힘입어 70%에 이르는 지지도를 얻었다. 


 



 





 






조지 워커 부시(George Walker Bush 1946년 7월 6일 - )는 미국의 정치인이다. 2000년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 소속으로 출마, 당선되어 2001년부터 제43대 대통령으로 재직했으며, 2004년 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어, 2009년 1월 20일까지 재임하였다. 1989년 ~ 1993년 제41대 대통령으로 재직한 조지 H. W. 부시의 장남으로,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전직 대통령의 아들로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영광을 누리게 된 인물이기도 하다. 


 






 


☞ Bonus) 아래는 오바마 취임사에 등장하는 단어들입니다.







 



- 사진 출처: http://cafe.daum.net/mediglish (미국 FOX 방송사의 방송내용을 캡쳐해서 사진으로 만든 것) 

- 정보 출처: 위키페디아, 네이버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