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오늘 친구 만나기로 했어. 여자 친구에게 저녁에 영화 <해운대>를 보자고 하니 돌아오는 답변은 매몰차기만 하다. “나 오늘 저녁에 친구 만나기로 했어.”라는 대답. 그런데 이 말이 나를 헷갈리게 만든다. 내 여자 친구에게는 15년이 넘은 오랜 묵은지 같은 친구가 한명 있다. 때론 그 친구 때문에 나는 찬밥신세로 전락하는 일도 다반사다. 일요일에도 그녀는 자신의 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나는 그 일정에 맞춰 2순위로 밀려난다. 나 보다 우선순위에 있는 친구의 이름은 ‘수지’다. 그녀가 ‘친구’라고 하면 사실상 ‘수지’를 뜻한다. 친구들이 대부분 결혼을 했고 곧 마흔을 바라보는 두 친구만 아직 솔로로 남아 있다. 둘 다 올해 안엔 어떻게 해서든 결혼하겠다고 난리다. 그러다 보니 둘의 유대는 날이 갈수록 공고해져만 간다. 내 여자 친구 ‘희주’는 친구들이 많다. 직장 동료들, 고등학교 친구들, 별고 보고 싶지 않은 부류의 밥맛없는 친구들 등등. 하지만 그녀가 “나 오늘 친구만나.”라고 한다면 사실상 ‘수지’를 지칭한다. 물론 나도 그 사실을 안다. 하지만 늘 알쏭달쏭한 것도 사실이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다.
I have an appointment with my friend tonight.
이 표현이 나를 늘 헷갈리게 만든다. 도대체 어떤 친구란 말인가? 십 년 전 10만원 떼먹고 도주했다는 그 친구? 지금까지 식사 후 밥값 한번 낸 적 없다는 그 짠순이 동숙이? 아무튼 모든 것이 불확실하기만 하다. 단순히 a friend 가 아니고 그 앞에 my 라는 한정사를 붙여서 대상의 범위를 아주 좁혀 주었음에도 혼란은 계속된다. 이 경우, 그녀가 만나는 대상이 ‘명주’라는 사실을 한 번에 알아차리도록 만드는 역할은 부정관사나 정관사를 가지고서는 힘겹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이름으로 대표되는 고유명사가 필요하다. 즉, 아래와 같이 말한다면, 모든 불확실한 상황이 단 한 번에 간단명료하게 정리된다.
I have an appointment with Su-ji to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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