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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이야기

<대조영>을 보면서 가정법을 익히자.





<대조영>을 보면서 가정법을 익히자. 우리역사의 변방으로 간주되어 소외만 당하고 있던 ‘발해사’를 본격적으로 안방 시청자들에게 소개한 대하드라마 <대조영>을 보고 있노라면 가정법 학습에 도움이 되는 인상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대군을 보내게 되고 이들의 공격을 받아 고구려의 신성과 부여성 일대를 비롯한 고구려의 많은 영토가 당의 수중에 넘어가게 된다. 급기야 평양성과 안시성을 비롯한 일부 요충지만 남은 상황. 지명천, 대조영을 비롯한 장수들이 결사항전을 소리높여 외치지만 당나라 대군 앞에 놓인 고구려의 운명은 한치 앞을 점치기 힘든 상황. 거기에 고구려 내부는 남과 북, 동과 서로 분열양상을 보이고 있고 설상가상 신라가 당나라를 도와 고구려 공격에 가담하면서 900년 역사의 대국 고구려의 운명은 한마디로 ‘풍전등화’로 전락하고 만다. 


주력군을 왕(보장왕)이 거주하고 있는 평양성으로 대거 이동시킨 뒤 안시성 성주 ‘대중상(대조영의 아버지)’은 평양성의 운명을 걱정하며 절규하듯 외친다. 그는 고구려의 멸망이 점점 현실로 다가옴을 직감한다. 부기원 일파를 비롯한 다른 간신배 무리들과는 달리 (드라마 속에서) 양만춘 장군의 수하로 평생을 당나라 오랑캐들과 싸우며 전장을 누빈 대중상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애국충정은 그 누구외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다. 평양성을 도우러 가야하지 않겠냐고 말하는 돌발(부하)을 향해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만약.. 만약에.. 평양성이 함락되고 우리 고구려가 무너진다면.. 그땐 이 요동이 나라를 되찾는 기반이 되어야 한다.”


쉬운 우리말이라서 전혀 가정법과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실제 가정법의 개념을 잡는데 큰 도움이 되는 예문이다. 가정법에 제대로 접금하기 위해서는 예제 100개를 단순히 풀고 암기하는 것 보다 특정 상황에서 사용된 단 하나의 문장이 지닌 그 표면적, 이면적 의미를 정확히 잡아내어 개념을 잡아내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충신 대중상에겐 고구려의 멸망이 분명 생각하기 조차 싫은 최악의 ‘시나리오’임이 분명하다. 그의 말 속에서 “만약에(if)”를 두 번씩이나 반복되고 있는 것이 그 사실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하지만 조국 고구려가 절대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는 그의 마음은 간절하나 모든 상황을 종합해볼 때 현실적으로 고구려가 당과 신라 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버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다. 정말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한. 따라서 ‘만약’이란 표현을 두번씩이나 사용하면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만약 대중상이 ‘영어’로 같은 표현을 구사한다면 분명 아래와 같이 말했을 것이다.


If Pyongyang collapsed and Goguryeo finally fell ~


즉, 철저히 ‘가정법 과거’ 형태를 취하면서 자신의 심리를 내비치는 것이다. 반면 자신들의 안위와 영달을 위해서라면 조국(고구려)도 적국(당나라)에 통째로 바칠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왕에게 항복을 권하는 '부기원'과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은 어떨까. 이들은 하루빨리 당나라에 백기를 내던져서 자신들의 목숨을 보존하는 일이 우선이다. 그렇다면  부기원과 그 일파들은 대중상의 표현 중 같은 조건문(If 절)을 어떻게 전달할까? 분명 아래와 같이 직설법을 사용해서 말하지 않을까? 


If Pyongyang collapse and Goguryeo finally fall ~


반면 고구려의 적인 당나라 대군의 선봉장 설인귀를 비롯한 그의 부하들(물론 당나라 병사들이다), 그리고 고구려 멸망으로 ‘영주’땅을 얻게 될 기대에 부풀어 있는 거란의 부족장 이진충은 어떻게 그들의 속마음을 표현할까? 이들 역시 부기원과 같은 화법을 구사할 것이다. 이들에게 고구려는 반드시 멸망시켜야 할 대상이기에 일고의 여지도 없이 직설법을 사용해서 표현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다.



얘기를 조금 비틀어 보자. 이 드라마를 제작한 KBS에서 <대조영>을 한류열풍을 등에 업고서 동남아시아 각국에 수출하고자 한다. 우리말은 못알아 들을테니 밑에 영어자막을  집어넣고자 한다면 위 대중상의 말은 어떻게 자막처리를 하면 좋을까? 자막담당자가 대중상의 말을 있는 그대로 영어로 옮겨서 아래와 같이 자막을 붙인다면 드라마 속 대중상의 조국애와 애절한 심리를 섬세히 전달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우리들이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제 3국의 시청자들이 아래와 같은 자막을 보게 된다면 고개를 갸우뚱할 지도 모를 일이다.


If Pyongyang collapse and Goguryeo finally fall ~


자막제작자는 반드시, 반드시, 아래와 같이 영어자막을 삽입해야 한다.


If Pyongyang collapsed and Goguryeo finally fell ~


즉, 대중상의 충정과 충성심, 그의 말 속에서 두번씩이나 반복되는 ‘만약에’란 표현, 이 말을 할때 대중상의 목소리가 다소 떨리면서 극도의 긴장을 자아내는 그 부분.. 여기에 마지막으로 대중상의 말 그 자체.. 이 모든 요소들이 합쳐져서 부기원이니 설인귀가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뉘앙스를 지닌 표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설령 겉으로는 동일한 표현일지 모르나. 자막제작자는 바로 이러한 섬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면서 가장 적합한 영어표현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위와 같은 문제 때문에 영화나 미드를 볼 때는 원문을 그대로 듣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단순히 영어자막만 쫓아 다니다간 우리말에 ‘아’다르고 ‘어’다르다고 했듯이 동사의 시제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각각의 문장이 전달하는 뉘앙스는 천지차이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