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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정보/잡동사니

한국 대중음악의 현재-03 한국의 인디레이블

저 : 박준흠

[음반기획]
허클베리 핀 [나를 닮은 사내 2집](2001/쌈넷)
V.A. [2001 쌈지사운드 페스티벌 Live 실황 2CD](2001/쌈넷)

[축제 · 공연 · 이벤트 기획]
Sub ’98 공연 ‘Live & Life’ (1998년 6월, KMTV홀)
쌈지 뮤직비디오 콘테스트 (2000년 9월, 쌈지스페이스)
2000 쌈지사운드 페스티벌 (2000년 10월, 연세대 노천극장)
2001 쌈지사운드 페스티벌 (2001년 10월, 연세대 노천극장)
제1회 한국대중음악상 (2004년 3월, 성균관대 600주년기념관)
2005 광명음악밸리축제 (2005년 10월, 광명시민운동장)
2006 광명음악밸리축제 (2006년 9월, 광명시민운동장)
‘가슴네트워크 선정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 (2007년 8월, 총 50주, 경향신문)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 인터뷰’ (2008년 3월, 총 30주, 네이버)
2008 광주청소년음악페스티벌 (2008년 5월, 김대중컨벤션센터)
‘한국의 인디레이블’ (2008년 7월, 총 30주, 경향신문)


Ⅰ. 한국의 인디레이블 _ 창작 대중음악의 현재
1. 지금 ‘인디레이블’을 다시 이야기 하는 이유 | 박준흠
2. 한국에서 인디레이블의 성장 과정 | 박준흠
3. 경향신문, 가슴네트워크 ‘한국의 인디레이블’ | 박준흠

Ⅱ. 한국의 인디레이블 _ 역사
- 1996년 발매 시작 레이블
01. 인디(Indie) - 한국 최초로 실질적 인디레이블 시스템을 도입하다 | 최규성
02. 석기시대(Stoneage Records) - 한국 인디 음악을 묵묵히 지켜 온 이름 | 홍정택
03. 드럭 레코드(Drug Record) - 펑크의 시작. 그것은 인디의 시작 | 이대화

- 1997년 발매 시작 레이블
04. 강아지문화예술(Gang A.G) - 아티스트의 다양한 감성을 즐기다 | 김민규

- 1998년 발매 시작 레이블
05. 스컹크 레이블(Skunk Label) - 펑크뮤지션들은 궁극적으로 ‘자기가 배척되지 않는 세상’을 원한다 | 박준흠
06. 카바레 사운드(Cavare Sound) - 한국 인디 씬의 스펙트럼을 넓히다 | 김양수
07. 문화사기단 - 세상이 사기라 외치던 겁없던 그들 | 홍정택
08. 라디오뮤직(Radio Music) - 미선이, 루시드 폴을 발굴한 홍대 포크의 산실 | 이대화

- 1999년 발매 시작 레이블
09. 쌈넷(ssamnet) - ‘쌈지의 눈’으로 검증시켜서 보여주는 역할이 문화예술과 관련된 쌈지의 입장이다 | 박준흠
10. 마스터플랜(Master Plan) - 한국 힙합의 성지에서 전천후 음악발전소로 | 배순탁
11. B-레코드(B-Record) - 라이브 클럽과 인디 레이블의 적절한 조합 | 김민규

- 2000년 발매 시작 레이블
12. GMC 레코드(GMC Records) - 10년을 독하게 이어 온 한국 하드코어 신의 중심 | 홍정택
13. 벌룬애니들(Balloon & Needle) - 노이즈에 대한 꾸준하고 진지한 행보 | 차우진
14. 튜브앰프 레코드(Tubeamp Records) - 뮤지션들의 ‘다음’을 위한 발판이 되고 싶다 | 홍정택
15. 문라이즈(Moonrise Records) - 인디 레이블의 새로운 시작 | 김학선

- 2001년 발매 시작 레이블
16. 쥬신 프로덕션(Jusin Production) - 대한민국 익스트림 메탈의 역사와 꿈이 모여 있는 레이블 | 성우진
17. 드림온(Dream On) - 용감한(?) 형제의 꿈과 음악적 열정을 담아 | 성우진

- 2002년 발매 시작 레이블
18. 롤리팝뮤직(Lollipop Music) - 2000년대 홍대 인디 팝의 신(新) 지류 | 이대화
19. 리버맨뮤직(Riverman Music) - 전 세계 희귀음원을 찾아 여행하는 레이블 | 최규성

- 2003년 발매 시작 레이블
20. 비트볼 레코드(Beatball Records) - 열혈 음악 애호가의 진심을 담은 레이블 | 김민규
21. 샤 레이블(Sha Label) - 화려함보다 중요한 건 뮤지션만의 개성! | 배순탁
22. 에그뮤직(EGG Music) - Everlasting Gallery of Good Music | 성우진
23. 도프뮤직(Dope Music) - 한국 헤비니스 음악의 중심 | 김학선
24. 퀸 엔터테인먼트(Queen Entertainment) - 퀸이라는 라이브클럽을 중심으로 사업 다각화, 소속 뮤지션들의 앨범 제작 | 성우진
25. 리듬온(Rhythm On) - 아날로그 음악을 수호하는 마지막 보루 | 최규성
26. 비행선(Bihaengsun) - 자유롭게 맘 가는 대로 | 김민규
27. 신의의지 레코드(Will Records) - 아티스트들의 음악세계를 존중하며 한국힙합 신을 이끌었던 레이블 | 강일권

- 2004년 발매 시작 레이블
28. 파스텔뮤직(Pastel Music) - 인디와 메이저 사이의 교두보 | 차우진
29. 소울컴퍼니(Soul Company) - 음악과 시, 그리고 힙합이 만나는 그곳 | 강일권
30. 빅딜 레코드(Big Deal Records) - 하드코어 힙합의 결정체들로 이루어진 집단 | 강일권
31. 루핀 레코드(Lupin Records) - 레이블과 엔터테인먼트 사이의, 중도좌파 레이블 | 홍정택
32. 핑퐁사운드(Pingpong Sound) - 포크에서 슈게이징, 일렉트로니카까지 | 김민규

- 2005년 발매 시작 레이블
33. 일렉트릭 뮤즈(Electric Muse) - 뮤지션 출신의 제작자가 건립한 인디 팝/록의 새로운 거점 | 최규성
34. 붕가붕가 레코드(BGBG Records) - 지속가능한 그들의 빡센 취미생활 | 홍정택
35. 해피로봇 레코드(Happy Robot Records) - 취향을 전략으로 삼는 레이블 | 차우진
36. 타일뮤직(Tyle Music) - 가장 감각적이며 스타일리쉬한 레이블 | 김학선

- 2006년 발매 시작 레이블
37. 루비살롱 레코드(Rubysalon Record) - 우주를 향해 볼륨을 높여라 | 최민우
38. 튠테이블 무브먼트(Tune Table Movement) - 둘러앉아 소통하는 음악 공동체를 향하여 | 최민우

- 2007년 발매 시작 레이블
39. 파고뮤직(FarGo Music) - 홍보와 마케팅에서 협력 관계를 갖는 새로운 운영방식 | 성우진

Ⅲ. 한국의 인디레이블 _ 부록
2008 가슴어워드(Gaseum Awards) - 2008년 한국 대중음악 결산 | 박준흠




출판사 리뷰

“언니네이발관에서 장기하까지, 한국 인디음악의 모든 것을 담아냄”
“한국의 대표적인 39개 인디레이블 대표들과의 생생한 인터뷰 수록”
“39개 인디레이블이 발행한 음반들 소개”
“1000여 컷에 이르는 인디레이블 대표, 뮤지션, 음반에 관한 풍부한 사진 자료 수록”
“1997년, 한국 인디음악의 초창기부터 대중음악전문지 ‘서브’, 인터넷음악방송국 ‘쌈넷’, 문화기획그룹 ‘가슴네트워크’를 운영하면서 홍대 인디씬을 기록해온 책임편집자 박준흠이 얘기하는 한국 인디음악의 현재와 미래”

“장기하 때문에 인디음악이 떳다고? 천만의 말씀. 이미 2000년, 델리스파이스의 김민규가 문라이즈레코드를 설립할 당시부터 현재의 인디음악은 뜰 준비가 되어 있었다.”
“대중음악축제의 성장과 함께 적어도 향후 10년은 인디음악의 성장세가 지속될 것이다.”

2000년대 현재 활동하는 뮤지션들의 수와 그들 작품의 수준은 오히려 1990년대를 능가하고 있다. 2002년 이후 인디씬에 정착한 ‘홈레코딩’ 기반의 음반제작 환경은 뮤지션들에게 운신의 폭을 넓혀줘서 최소한 자본이 없어서 음반을 제작하지 못하는 시대를 종식시켰기 때문이다. 나아가 홈레코딩 관련 기술의 발전으로 뮤지션이 기술적인 능력만 있다면 일반 스튜디오 작업에 부럽지 않게 녹음하는 것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인디 뮤지션들은 스스로 자신의 음반사를 만들어서 앨범 제작을 하고 있다. 현재 인디레이블들은 나름의 음악적인 색깔을 갖는 것을 고민하면서 기획, 창작, 프로듀싱, 세션, 레코딩 등의 부분에서 진일보를 거듭하고 있다. 대중음악에서도 ‘역시 중요한 것은 창작’이라면, 이제라도 인디레이블에 대한 정확한 재조명이 필요하다. 

현재 한국 인디음악씬의 발전 과정은 아래와 같이 크게 4단계로 나뉜다.(※ 자세한 내용은 별첨의 《한국에서 인디레이블의 성장 과정》 참조.)
1) 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붕괴와 대안적인 활동 방안 
- 인디뮤직 씬의 시작 (1990~1996)
2) 인디와 강아지문화예술
- 인디레이블의 도약기 (1997~1999)
3) 문라이즈와 홈레코딩 
- 자주 레이블의 가속화 (2000~2004)
4) 음반기획과 음반프로듀싱
- 음악적인 스타일로 각 레이블 차별화 시도 (2005~현재)

“한국 ‘음악창작자’들의 지형도를 살펴봄”
“도서출판 선에서 발행하는 ‘한국 대중음악의 현재’ 시리즈의 완결판”

‘한국의 인디레이블’ 프로젝트를 생각한 것은 2008년 4월경이었다. 당시 필자는 2008 광주청소년음악페스티벌 총감독을 맡아서 광주광역시에 내려가 있을 때였다. 바로 전에 진행을 맡았던 네이버 오늘의뮤직 내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인터뷰’는 3월부터 연재가 시작되었고, 이미 연재 전에 인터뷰 진행은 거의 끝났었기 때문에 약간은 한가로울 때였다.(물론 축제 준비 자체는 무척 바빴지만.) 그래서 가슴네트워크에서 당분간 매체사업을 해보겠다고 결심한 터였기 때문에 새로운 아이템을 생각했다. 

이전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서 음반과 뮤지션을 다뤘기 때문에 이번에는 ‘음반사와 음반사 대표’를 한번 다뤄보고 싶었다. 여태까지 대중음악 관련 기획기사를 보면 거의 대부분이 신보를 냈거나 공연을 준비 중인 뮤지션과 그의 음반 중심이라서 뭔가 다양성 면에서 부족했다. 여기에는 결정적으로 ‘대중음악 기획’에 관한 점이 빠져 있었다. 사실 어떤 뮤지션이 아무리 훌륭한 노래를 만들어도 그걸 ‘음반기획’ 측면으로 연결시키지 못하면 대중들은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다. 뛰어난 뮤지션을 알아보고 그에 걸맞는 음반기획을 해주는 음반제작자는 음악씬에서 무척 중요한 존재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1990년대 들어와서 그런 음반기획자들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열악한 상태로 전락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서는 ‘음반기획 측면에서의 대안적인 시스템’인 인디음반 시스템이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더욱이 2000년대 들어서서 홈레코딩 음반제작 시스템의 급격한 발전으로 뮤지션 스스로가 자신의 레이블을 만드는 것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고, 2003년 무렵부터는 인디레이블의 숫자가 점진적으로 늘어났다. 

이번 연재 기획인 ‘한국의 인디레이블’은 2000년대 들어서서 새롭게 대두된 인디레이블의 현재 상황과 ‘성장 이유’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방법론적으로는 음반기획 측면에서 인디레이블 대표를 인터뷰하는 방식을 택했다. 또한 해당 인디레이블에서 발매된 음반들을 소개함으로써 대중음악을 뮤지션과 음반을 넘어서서 ‘기획과 제작’ 측면에서 조망하려고 했다. 이번에 다룬 39개 인디레이블의 선정 기준은 창작적으로 뛰어난 음반이 얼마나 나왔는지가 관건이었다.(기타 음악적으로 조명할만한 가치를 갖는 레이블도 선정 대상이었다.) 그?서 이번 39개 인디레이블들에 대한 기록은 현재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슴 주목할 만한 음악창작자들이 어떤 식으로 분포하고 있는지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한국 음악창작자들의 지형도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원래 타이틀도 “한국 대중음악의 현재 - ‘인디레이블’을 통해서 살펴본 인디음악의 현주소와 한국 음악창작자들의 지형도”였다. (박준흠/ 가슴네트워크 대표)

1) 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붕괴와 대안적인 활동 방안 
- 인디뮤직 씬의 시작 (1990~1996)

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붕괴와 대안적인 활동 방안의 필요성, ‘인디뮤직’이 갖는 의미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앨범 개념의 음반이 나온 것은 1964년에 발표된 신중현의 애드 훠(Add 4) 1집 [빗속의 여인](엘케엘레코드) 이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당시 매우 특이한 경우였고, 제대로 된 창작물을 담은 앨범들이 발표된 시기는 70년대 초반의 모던포크 시대부터다. 그것이 바로 한대수, 김민기, 양병집, 서유석, 양희은의 초기작들이었고, 록에서는 신중현의 음반들이 있었다. 그러나 70년대는 앨범으로서의 음반이 처음으로 발표된 시기 정도라는 의미를 가질지언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평가할만한 창작물은 소수의 뮤지션들에게서만 보일뿐이었고, 또한 프로듀싱, 세션, 레코딩과 같이 앨범 평가에서의 중요한 개념은 특별히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내가 아는 한 지금의 프로듀싱, 세션, 레코딩의 개념이 보이기 시작한 앨범은 1984년에 발표된 따로 또 같이 2집이 처음이다. 이전에 작은거인이 2집(1981년)에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세션과 레코딩 사운드를 들려주었지만 그건 원맨밴드 성격이었고, 엔지니어도 지다가와 마사토라는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세션, 레코딩 역사에 넣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앨범이 나온 시기를 80년대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80년대는 다양한 뮤지션들과 다양한 음악들이 조화를 이루었던 시기였고, 그래서 뛰어난 음반들도 많이 나왔다. 한마디로 언더그라운드와 오버그라운드가 조화를 이루었던 시기였고, 이 때 나온 뮤지션이 김현식, 어떤날, 시인과촌장, 신촌블루스, 한영애, 장필순 등이었다. 이들은 ‘언더그라운드의 거장’으로 얘기되면서 음악성도 높이 평가받았고, 또한 음반도 10만장 단위로 팔았다. 아이돌스타들만이 주로 주목받는 현재 음악환경을 생각했을 때 이는 매우 경이로운 사실이다. 당시는 뮤지션을 음악으로 평가하는 음악수용자들이 무척 많았거나, 음악수용자들에게 음악으로 승부하는 음반제작 풍토가 존재했던 것 같다. 뮤지션들에게는 무척이나 좋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1992년 서태지 등장 이후 한국 대중음악계는 아이돌스타를 양산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었고, 이는 단기간에 가장 손쉽게 큰 돈을 버는 사업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대중음악계에서의 가수 선발 기준은 음악성이 아니라 외모와 같은 스타성으로 바뀌었고, 철저히 10대들을 주요 고객으로 생각하는 기획시스템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 운영을 위해 지속적으로 새로운 ‘연예인’들이 필요했던 공중파방송에서도 이를 부추킨 측면이 있다. 그 결과 80년대 언더그라운드 뮤지션 부류는 더 이상 음반 제작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80년대 언더그라운드 음악씬의 붕괴였고, 한국 대중음악사 측면에서 보면 음악적인 자산을 잃어버리는 커다란 손실이었다. 1990년 11월 1일에 김현식이 사망했고, 유작 앨범인 6집은 100만장 이상 팔렸는데, 이는 향후 더 이상 나오지 않을 언더그라운드 음악씬의 기록일 것이다. 

결국 ‘음악적인 진정성’을 자신의 음악에 투영하고 싶어 하는, 즉 ‘뮤지션’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나 그런 음악을 듣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대안적인 시스템’을 생각했는데, 이것이 ‘인디뮤직(씬)’이다. 여기서 ‘대안적’이라는 말은 음악 미학 측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음반 제작을 포함한 음악 활동 시스템’을 의미한다. 기존의 음반제작자들이 ‘창작에서 간섭받지 않으면서 완성도 높은 앨범 제작을 추구하는’ 언더그라운드 뮤지션 부류에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뮤지션들로서는 어쩔 수 없이 자구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스스로 음반을 만들거나 적어도 뮤지션이 앨범을 만드는데 있어 간섭을 하지 않는 제작자 부류를 원하게 되었다. 이것이 ‘인디레이블’이 갖는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즉, 인디는 진정한 뮤지션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택하는 공간이자 ‘시스템’이다. 그래서 ‘인디’를 얘기할 때 ‘음악창작’ 부분을 빼고 얘기하면 타당하지 않다. 

‘인디뮤직 씬’의 탄생, 라이브클럽 드럭

90년대 초반 대안적인 문화와 시스템을 바라던 사람들이 실험을 하기 시작한 곳은 홍대 주변이었다. 당시 ‘발전소’와 같은 음악과 미술, 춤이 어우러지는 클럽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1994년에 생긴 ‘드럭’은 인디밴드들이 공겿을 하는 라이브클럽의 시작이었다. 사실 드럭은 처음부터 라이브클럽이 아니었다. 클럽 드럭은 1994년에 영국의 전설적인 펑크밴드 클래시(The Clash)의 [London Calling](1979) 재킷 사진이 복사된 4절지에 ‘펑크록의 이상’이 격문처럼 쓰여진 포스터를 문에 붙이고 개장하였지만, 당시는 정기적인 공연을 염두에 두거나 인디뮤지션들의 근거지 개념은 없었다. 

초기 드럭의 공간은 뮤직비디오가 나오는 조그만 TV들을 소도구로 이용한 ‘바/카페’의 개념이었고, 단지 한쪽에 밴드들이 연주를 할 수 있는 그믈망이 앞에 처진 작은 장소가 마련되었다는 점이 달랐다. 이는 당시 신촌의 현대백화점 뒷쪽에 있었던 록카페들의 확장된 개념의 클럽이었다. 하지만 너바나의 여파로 그런지록이 인기를 얻고 70년대 펑크가 재조명을 받으면서, 특히 1994년 4월 8일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이 사망하여 ‘그런지록의 전설’로 남으면서 한국에서도 카피밴드 수준의 그런지록과 펑크밴드들이 생겨났다. 이들의 연주가 수용될 수 있었던 드럭은 흔히 말해 드롭아웃(drop-out)들의 해방구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당시는 ‘공연장’의 개념만 있어서 어느 정도 전문적인 수준의 연주를 하는 밴드들(대개 헤비메틀 밴드들)은 무대에 설 수 있었지만 그 이하 수준의 밴드들은 대중 앞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1995년 4월에는 드럭에서 커트 코벤인 1주기 추모공연이 열렸고, 이 때를 즈음해서 ‘드럭 밴드’라는 이름으로 정기 공연 체제가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이 해부터 크라잉 넛, 언니네 이발관, 델리 스파이스, 코코어 등이 연주를 하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도 크라잉 넛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드럭은 점차 펑크록 중심의 라이브클럽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드럭이 펑크록의 메카로 자리 잡은 것은 1996년에 홍대 주차장거리와 명동에서 있었던 모잡지 주최의 ‘스트리트 펑크쇼’에 드럭의 밴드들이 주축이 되어 참여하면서부터이다. 이 당시 보여주었던 관중들의 폭발적인 열기는 매체를 타고 전파되었고, 이런 호응을 얻어서 드럭에서 처음 만든 음반이 바로 [Our Nation]이었다. 이게 최초의 인디 앨범으로 얘기되고 있고, 그 해에는 ‘배드 테이스트’의 [One Man Band... Badtaste]도 발매되었다.

2) 인디와 강아지문화예술
- 인디레이블의 도약기 (1997~1999)

인디레이블은 거대 상업 논리 하의 음악비즈니스 시스템에서에서 뮤지션에게 그나마 자유를 주는데, 좀 더 자신의 스타일을 지킬 수 있는 음악을 할 수 있게 하는 장치가 되기 때문이다. 이는 상업성만을 생각하게끔 되어 있는 구조를 가진 메이저 음반사가 할 수 없는 일들이 인디레이블 체제에서는 가능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인디레이블은 마이너 성향의 뮤지션에게 있어 대중에 대한 창구일 수가 있고, 이것이 인디레이블 존재에 대한 당위성이다. 인디와 강아지문화예술은 한국에서 인디레이블 시스템이 정착되는데 있어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레이블들이다.

인디(Indie)는 드럭, 재머스에 이은 인디레이블로 출발했지만 앞의 두 음반사가 자신들의 클럽과 클럽 밴드들을 홍보하려는 이유로 출발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제한된 범위에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인디는 국내 최초의 ‘인디레이블’이라고도 할 수가 있다. 음반사 인디의 모체는 10년간 사회운동단체에서 활동하다가 대중음악씬에 발을 들여놓은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만들어진 ‘뮤직센터21세기’였다. 이후 탄생된 인디는 “계약 기간은 1년이다. 손익분기점(3천장)을 넘기면 수익배분은 4 : 4 : 2(밴드 : 인디와 스튜디오 : 홍보비)로 한다. 밴드는 클럽 공연을 지속해야 한다. 인디가 망했을 때 인디를 인수한 사람의 의도가 애초의 인디의 의도와 맞지 않으면 음반의 판권은 밴드에게 간다”라는 뮤지션 측에 가장 큰 권리를 주는 명문화된 계약 조건을 내걸었다. 인디의 음반제작실장인 김종휘와 록밴드 허벅지의 보컬 안이영노는 인디 운영에서의 브레인이었는데, 이들은 1996년 봄에 시작된 각기 다른 클럽에 섰던 밴드들이 한 달에 한번씩 모여 릴레이로 공연을 벌였던 ‘땅밑 달리기’를 주도한 중추 세력이기도 했다. 이들은 SM(실천하는 문화전사)을 표방하며 클럽 씬과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의 소식지인 ‘팬진 공’을 1997년에 ‘폐간’하는 일도 벌였다. 

1997년 10월 인디, 팬진 공, 개클련(개방적 클럽 연대)에 의해서 노노 클럽에서 열린 ‘인디 시연회’는 향후 인디에서 발매할 밴드들을 선정하는 오디션 성격의 이벤트였고, 여기서는 코코어, 프리다칼로, 허벅지, 앤, 마루, 오딘, 삼청교육대, 아무밴드가 선정되었다. 그 해 12월 27일, 28일에는 인디 주최로 정동 문화체육관에서 ‘인디 록 페스티벌(정축년 독립만세 사건)’이 열렸다. 이후 제작된 인디 음반들은 사운드랩 스튜디오에서 고종진 엔지니어가 레코딩/믹싱을 하였고, 앤, 오딘, 삼청교육대, 아무밴드의 프로듀서는 서울재즈아카데미의 강사이기도 했던 기타리스트 김성수가 맡았다.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인디가 만든 가장 큰 업적은 다들 생각에만 머문 ‘인디레이블’을 현실화 시켜서 이들 성과에 대한 논의 여부를 떠나서 ‘시스템’을 만들어 냈다는 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인디는 1999년을 넘기지 못하고 운영을 중단했다.

강아지문화예술은 5명의 고등학교 동창생들(권병준, 이한별, 이효찬 등)이 자신들의 밴드인 강아지 독집 음반을 준비하다가 1997년에 만든 인디레이블이다. ‘인디’와 다른 점은 뮤지션들이 만든 음반사라는 점이고, 그로 인해 자신들이 직접 음반 제작(레코딩, 믹싱, 마스터링)에 참여함으로써 느낌에 충실한 음반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러브마트의 데모 음반이나 허클베리 핀, 갱톨릭의 음반을 들어보면 알 수 있는데, 특히 허클베리 핀의 데뷔 음반은 완성도면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주위에서 도움을 주는 뮤지션들(99의 성기완, 노클루의 송현주, 도현호 등)이 있었다. 초기에는 방송 홍보 자체를 거부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했고, 최종적으로 영상, 인터넷방송 등 총체적인 문화 사업을 꾀했다. 기존 시장에서 음반화되기 힘든 밴드들의 음악도 팬들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운영했지만 이들 또한 1999년을 넘기지 못했다. 

3) 문라이즈와 홈레코딩 
- 자주 레이블의 가속화 (2000~2004)

2000년은 인디레이블 역사를 가르는 분수령이다. ‘현재’ 인디레이블들은 나름의 음악적인 색깔을 갖는 것을 고민하면서 기획, 창작, 프로듀싱, 세션, 레코딩 등의 부분에서 진일보를 거듭하고 있는데, 이 새로운 인디레이블의 시작점은 2000년에 만들어진 문라이즈(Moonrise Record)였다. 이 레이블은 델리스파이스의 김민규(기타, 보컬)가 본인의 솔로 프로젝트인 스위트피(Sweetpea)의 1집 [Never Ending Stories]를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로써 한국 대중음악계는 콘텐츠 면에서 몰라보게 풍부해지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1999년을 기점으로 초기 인디레이블을 주도했던 강아지문화예술과 인디가 시장의 한계에 부딪쳤고, 그로써 부진한 활동을 하면서 잠시 과도기가 있었다. 그 와중에 홈레코딩(home-recording) 기술과 관련 소프트웨어, PC(하드웨어) 발전에 영향 받아 인디레이블 자체의 패러다임도 서서히 변해가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개의 인디뮤지션들은 ‘자신이 운영하지 않는’ 저자본 레이블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방식이었는데, 인디레이블이 메이저레이블과는 매니지먼트 방식이 다르더라도 소속 뮤지션들이 자본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러다가 스위트피가 문라이즈 레이블을 만든 2000년 이후로는 점차 홈레코딩이 보편화되면서 뮤지션들의 입장에서는 비로소 ‘자생적인’ 인디뮤직씬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스위트피의 1집 [Never Ending Stories](2000)를 필두로 전자양 [Day Is Far Too Long](2001), 마이 언트 매리(My Aunt Mary) [2nd My Aunt Mary](2001), Where The Story Ends [안내섬광](2001), 토마스 쿡(Thomas Cook) [Time Table](2001)이라는 명반들을 발매하였던 문라이즈는 한국 인디씬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문라이즈의 결과물들을 보고나서 뮤지션들은 새로운 인디레이블의 패러다임을 실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고, 자신이 음반제작의 주체가 되는 것이 장기적으로 음악을 계속할 수 있는 방편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여파는 2002년 이후로 인디씬에 나타나기 시작해서 무수한 ‘자가’(뮤지션 스스로 설립해서 운영하는) 인디레이블이 생겨났다.

4) 음반기획과 음반프로듀싱
- 음악적인 스타일로 각 레이블 차별화 시도 (2005~)

홈레코딩으로 ‘음반제작’ 자체가 원활해지자 레이블들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음반제작에 있어 ‘음악적인 전문성’을 부여하는 문제였다. 이는 다름 아닌 ‘음반기획’과 ‘음반프로듀싱’에 관한 문제였고, 이를 통해 각 레이블이 자신들만의 음악적인 스타일을 갖는 것이다. 즉, 차별화를 꾀하려는 것이었다. 파스텔뮤직, GMC, 일렉트릭 뮤즈, 튠테이블 무브먼트와 같은 레이블들이 대표적이다.

+ 출처: 예스24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