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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⑮부산 광복동 (下)

[길]⑮부산 광복동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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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동엔 공터가 존재하지 않는다. 부산시내에서 제일 땅값이 비싼 곳. 고수익을 올릴 수 있는 상가만이 존재할 수 있다. 상가는 끝없이 이어져 긴 파도를 만나듯 숨이 찬다. 사방천지 간판물결이다. 이런 상점의 물결속에 낭만과 문화를 간직한 공간들이 작은 섬처럼 떠있는 곳이 광복동이다. 그 ‘문화의 섬’은 50년대 다방문화를 이어 70년대 한창 꽃을 피운다. 

#도시속의 섬과 같은 존재

60년대 말부터 70년대 말, 좀더 길게 보면 80년대 중반까지 광복동은 고전음악 감상실과 대형 민속주점의 시대였다. 전원, 르네상스, 무아, 백조, 사계, 필하모니…. 이런 고전음악 감상실이 젊은이들의 문화공간 역할을 톡톡히 했다. 특히 르네상스 음악감상실은 부산 동래 출신인 국내 포크송의 개척자 가수 한대수씨가 68년 데뷔 당시 노래를 부른 곳으로 유명하다.

미화당백화점 옆 청수그릴은 주머니사정이 괜찮은 젊은이들이 데이트를 하던 레스토랑이었다. 미화당백화점 맞은 편의 9월다방, 로얄호텔 부근의 애천다방, 옛 시청자리에서 본 광복동 입구의 백조다방도 부산의 문인들과 화가,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던 곳이다. 이들 다방은 80년대까지 문학을 꿈꾸던 대학생들이 습작품을 들고 토론을 하고 시화전을 갖던 곳이다.

다방에서 시화전을 연 것은 무엇보다 전시공간이 부족했고 학생 입장에서 비싼 임대료를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전 6·25 피란시절 ‘다방문화’를 일으켰던 문인들을 동경하며, 그 후예를 자처하며 싼 임대료를 내고 혹은 일일찻집 티켓을 팔며 전시장소를 마련했던 것이다.

그러나 광복동은 유행의 물결이 거센 곳. 이들 다방은 화려한 패션몰이 들어서는 곳에서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비싼 임대료를 감당하기 힘들어 결국 밀려나고 말았다.

최근 다시 이 길을 찾았을 땐 ‘그때 그곳’은 보이지 않았다. 애천다방은 여성 속옷가게로, 지하1층의 백조다방은 농협 건물의 주차장으로 바뀌어 예전의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나뭇잎이 떨어지고 다시 새잎이 돋듯 문화공간도 사라지고 거듭난다. 지난 3월 문을 연 국도아트홀은 2000년대 새로 난 ‘문화의 잎’이다. 국도레코드 사옥인 이 건물의 4층은 아트홀이다. 80여평의 홀은 평소에는 전시장 겸 음악감상실로, 연주회가 있을 때는 공연장이 된다.

문화게릴라 이윤택씨가 이끄는 연희단거리패의 산실 가마골소극장도 광복동에 자리한 문화공간이다. 옛 시청쪽 광복동 입구에 자리한 이곳은 ‘산씻김’(88년) ‘시민K’(89년) ‘오구’(90년) 등 화제작들이 잇따라 탄생한 곳으로 유명하다. 86년 7월 광복동에 문을 연 가마골소극장은 88년 중앙동, 97년 광안리 등지를 거쳐 지난해 4월 15년만에 다시 광복동으로 돌아왔다.

세월 앞에서 견디는 것은 없다. 그 유명한 ‘양산박’도 이젠 쇠락의 길위에 있다. 광복동 초입, 백조다방앞에 있었던 포장마차 ‘양산박’은 유신말기 과외금지조치때 생겨난 광복동의 명물이었다. 당시 부산일보 기자였던 이윤택, 박창호, 박정인, 정학종씨와 시인 임명수씨가 과외로 생계를 잇던 선배를 돕기 위해 2만원씩 거둬 포장마차를 마련해 준 것이 모태가 되었다. 이곳은 문화계 인사뿐만 아니라 퇴직기자, 운동권 출신 등이 모여 우울한 시대, 울분을 토했던 곳이었다. 이후 ‘양산박’은 남포동 초입에서 민락동 MBC 옆으로 옮겼다가 다시 동광동 골목길에 정착, 시인 임명수씨가 명맥만 잇고 있다.

#옛 명성 회복 꿈꾸는 상권

광복동의 중심은 옛 미화당백화점이다.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 일반인들도 약속장소 정하기가 마땅찮으면 미화당 앞에서 보자고 했을 정도다.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광복동 상권도 IMF의 직격탄을 맞았다. 엎친 데 덥친 격으로 98년 2월 부산시청사가 양정으로 이전된 후 유동인구가 계속 줄어 부산의 중심상가라는 옛 명성은 빛을 바랬다. 97년 미화당백화점도 부도가 났다.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산의 노른자위 상권에서 몰락하리라는 것을. (주)엘칸토가 옛 미화당백화점 건물을 장기임차, 패션전문점을 개점했지만 엘칸토도 그해 12월 자금난으로 화의신청하면서 매장을 철수했다. 현재는 (주)유원리츠의 아웃렛 쇼핑몰 ‘플러스 플러스’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상가는 피고 지는 꽃잎처럼 문을 닫고 새로 선보인다. 광복동이 그렇다. 한곳에서는 문을 닫고 한곳에서는 신장개업이다. 광복동은 젊음과 패션거리란 주제로 상권회복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그러나 상인들은 내년 옛 부산시청부지에 들어설 제2롯데월드 개장만 손꼽아 기다린다.

/부산·이동형기자 spark@kyunghyang.com/

-커피향기속 詩는 흐르고-

▲문인다방의 후예 ‘시상’

창선파출소 앞 다방 ‘시상’은 이미 사라진 9월다방과 백조다방의 전통을 잇는 곳. 이곳은 주변 화려한 패션몰과 어울리지 않게 조금 ‘보수적’이다. 옛 백조다방 분위기가 조금 현대적으로 바뀐 것 같다. 낡은 초판 시집본들과 오래된 문예잡지들이 쭉 늘어선 책꽂이가 눈길을 끈다. 책을 펼칠 때마다 빛바랜 종이가 떨어질 것 같다. 그리고 시인들의 시화와 함께 용두산공원의 시비를 사진액자에 담아 전시한 것도 색다르다. 직접 볶은 커피향이 실내 분위기를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부산의 시인들도 처음 찾았을 땐 ‘광복동에 이런 곳이 있었나’ 하며 반가워 한다.

상업 물결 속에 외톨이 섬처럼 자리한 ‘시상’의 주인 이동열씨(33)는 광복동 문화공간의 전통을 이어갈 생각으로 열었단다. 문을 연 지 이제 겨우 1년쯤 되지만 이씨는 더 이상 가게를 유지하기 힘들어 문을 닫을까 한다며 말을 흐렸다. 문화의 쉼터로 공개했지만 80년대와 달리 대학 문학동아리에서조차 자주 찾지 않아 ‘한가한 공간’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한번쯤 꼭 들러보는…-

▲대표적 휴식공간 용두산공원

부산을 방문한 일본인 관광객들을 비롯, 외지인들은 누구나 한번쯤 용두산공원을 찾는다. 그만큼 부산을 대표하는 공원이다. 용두산공원은 도심 한가운데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큰 의의가 있다. 말 그대로 도시속의 쉼터다.

용두산공원은 초량왜관시절부터 1945년 8월15일 해방때까지 일본 신사가 자리잡고 있던 곳이었다. 그 당시 일본사람들에 의해 주변 1만2천평이 처음으로 공원으로 지정됐다. 이곳은 6·25때 피란민들이 몰려 판자촌을 이루기도 한 곳이다. 현재의 공원이 된 것은 54년 12월10일 큰불로 인해 판자촌이 모두 불 타 없어지면서부터였다.

용두산은 말 그대로 용의 머리를 뜻한다. 그렇다면 용미산도 있나? 물론이다. 옛 부산시청 자리가 바로 용미산이다. 이를 일본인들이 앞바다를 매립하면서 용미산을 깎아버렸다.

옛날에는 해송이 많아 송현산(松峴山)이라고 불렀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1876년 일본사람들이 몰려들어 정착하면서 해송들이 시름시름 말라 죽어갔다는 것이다. 그후 54년 대화재때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지금의 나무들은 그 이후 다시 심은 것들이다.

공원 한복판에 높이 120m로 우뚝 솟은 부산탑 꼭대기의 전망대는 경주 불국사 다보탑 지붕에 얹혀있는 보개(寶蓋)를 본떠 만든 것이다. 이곳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을 비롯, 곳곳에 자연석에 새긴 시비(詩碑)가 단장되어 있다. 부산 시민들의 대표적 휴식처이지만 갈 데 없는 할아버지들이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곳이기도 하다. 

/이동형기자/

+ 기사출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