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북 ★★★☆
감독 : 폴 버호벤(원초적 본능, 스타쉽 트루퍼스)
출연 : 캐리슨 밴 허슨, 세바스티안 코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1938년에 태어났으니 한국 나이로 70이 다 됐다. ‘노인의 지혜’ ‘온화한 풍모’ ‘넓은 아량’ 같은 걸 기대할법도 한데, 이 나이든 감독의 잔혹 취미는 여전하다. 하긴 여태까지 센세이셔널하게 기억되는 ‘원초적 본능’(92)을 만들었을 때 그는 이미 지천명이었다. 인간의 골수가 외계 곤충에게 빨리는 ‘스타쉽 트루퍼스’(97), 폭력과 성에 대한 숨은 본능을 들춰낸 ‘할로우 맨’(2000)에 이르기까지, 버호벤은 할리우드 스튜디오 간부가 참아낼 수 있는 표현의 한계를 농락하듯 건드려왔다.
‘할로우 맨’이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실패하자 버호벤의 처지는 단물 빠진 껌이었다. 영화 제작이 몇 차례 무산된 뒤 버호벤은 짐을 꾸려 고향으로 향했다. 절치부심 끝에 부여잡은 시나리오는 실화를 원작으로 한 ‘블랙북’이었다. 영어, 네덜란드어, 독어가 혼재하는 영화다.
1956년 이스라엘의 키부츠 농장에서 일하는 레이첼은 성지 순례단의 일원으로 온 옛 친구를 만나 2차대전 당시를 회고한다. 부유한 유대인 집안이었던 레이첼 가족은 브로커에게 거액을 내고 독일 지배하의 네덜란드를 탈출하려 하지만, 레이첼을 제외한 전원이 나치에게 발각돼 몰살당한다. 레이첼은 복수를 다짐하고 네덜란드 내 레지스탕스 집단에 가입한다. 집단은 지혜롭고 아름다운 레이첼을 스파이로 활용한다. 레이첼은 나치 장교 문츠에게 접근해 연인이 된다. 레이첼과 문츠는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나치와 레지스탕스는 둘의 연애를 용납하려들지 않는다.
‘전쟁을 배경으로 한 연인의 이룰 수 없는 애절한 사랑’을 연상한다면 반 정도만 맞다. 사람의 마음 속 여러 가지 측면, 그중에서도 특히 어두컴컴한 부분에 시선을 돌려왔던 버호벤 감독은 로맨틱한 연애담을 찍을 생각이 없었다. ‘블랙북’에서 유대인과 나치는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나뉘지 않는다. 착한 나치도 있고, 나쁜 유대인도 있다. 개봉 중인 영화 ‘타인의 삶’에서 구 동독에 거주하며 자유를 갈망하는 극작가로 출연했던 세바스티안 코치는 비교적 온화한 독일인 문츠로 등장한다. 독일의 패망을 기정사실화하는 그는 레지스탕스와의 은밀한 거래를 통해 무고한 희생자를 줄이고자 노력한다.
2차 대전 종전 후 과거사를 정리하며 나치 부역자를 심판하는 시간. 기세등등해진 유대인들은 나치에 부역한 동족에게 모욕을 준다. 오해를 받아 부역자로 몰린 레이첼은 온갖 수모를 당한다. 반라로 수용소에 갇힌 레이첼은 수백명의 분뇨가 담긴 똥통을 고스란히 뒤집어쓴다.
이야기는 군더더기 없이 빠르게 진행된다. ‘총=성기’ 같은 단순한 비유가 나오긴 하지만, 크게 책잡힐 일은 아니다. 레이첼은 유대인임을 숨기기 위해 머리카락은 물론 음모까지 금발로 염색한다. 음모 염색 장면, 똥통 장면 등 다른 감독이라면 관객을 불편하게 할까봐 마음 졸이며 넣지 않을 법한 장면도 넣어버리는 게 버호벤 감독의 특기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섹스를 거래하는 레이첼의 모습은 일부 관객에게 윤리적 불편함을 안기기에 충분하지만, 이 감독은 이미 당위의 영역을 넘어서 ‘노는’ 감독이다. 블랙북이란 정부가 국가 기밀을 담아 숨기고 있는 문서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한다.
〈백승찬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 기사출처: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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