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공부하는 관사 김춘수 시인의 ‘꽃’을 가지고서도 관사를 학습할 수 있다.
< 꽃 >
- 김 춘 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사전 속에 정의된 ‘flower', 문자의 나열(f.l.o.w.e.r)이자 '꽃'으로 설명된 하나의 '정의'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부정관사 a를 붙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비로소 하나의 '대상'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우리집 화분에서 키우고 있는 할미꽃, 일주일 전 영숙이에게 선물한다고 공원에서 꺾은 무궁화 100송이, 오바마 취임식에 올라온 도라지꽃 등등. 내 주위에 있는 이 세상 모든 종류의 꽃들이 모두 a flower 에 해당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정관사 the를 붙였을 때 비로소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 즉 '고유성'을 획득한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위의 시 속에서 보듯이 사전 속에 등록되어 있는 모든 '단어'들은 갈구한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달라고. 하나의 대상이 되고 싶어 하고, 존재의 이유를 획득하고 싶어 한다. 거기서 더 나아가 자신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달라고 난리다. 정체성을 부여받고 싶어서. 폭스바겐은 자신을 폭스바겐이라고 불러달라고 아우성이다. 어제 도난당한 내 차는 a car 가 아닌 the car 로 불리길 간절히 바란다. 내 여자 친구는 a girlfriend 가 아닌 my girlfriend 로 늘 내 곁에 남기를 바란다. 그녀는 늘 말한다. 오빠 누구 남자친구야? 나는 대답한다. Your boyfriend. 라고. 그녀는 내가 자신의 남자친구이길 바란다. boyfriend, a boyfriend도 아니고, the boyfriend에서 보다 범위가 좁혀진, 가장 구체적인 의미를 지닌 your boyfriend란 대답을 듣기를 소망한다. 이런 간절한 소망에 가끔 주변머리 없는 전국의 오빠들은 “남자친구(a boyfriend)지 뭐긴 뭐야!”라는 퉁명스러운 대답을 남기며 그 기대를 여지없이 배반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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