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배우 명장면 100 - 이은주의 흑백영화, 유승호의 천진난만, 한석규의 순수, 손예진의 슬픔
나름 힘들게 타이핑해서 올린글 입니다. 지금 글을 읽고 계신 이 시간에도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구요. 으쌰으쌰! 퍼가실 때는 타이핑한 수고 정도 생각해서 게시물 URL을 밝혀 주시면 고맙지요. :)
(한석규의 순수, <초록 물고기> - 1997, 막동이) 한석규는 점점 도시적이고 간결하며 세련된 캐릭터로 옮겨가고 있다. <텔미 썸딩>부터 스릴러의 주인공이 된 그는, 미궁에 빠지고 망설이고 고뇌한다. 하지만 그가 가장 큰 혼란에 빠졌던 영화는 <초록 물고기>였다. 이 영화에서 한석규는,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악의 세계를 접하고, 결국은 피 묻은 손으로 공중전화 손잡이를 잡는다. "여보세요? 큰성이야? 나야, 막동이.. 엄마는? 엄마 어디 갔어?" 그의 유언과도 같은, 마지막 전화였다.
"화장실에서 김양길을 죽이고 공중전화부스를 거쳐 배태곤의 차 앞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 까지, 막동이가 걸어 간 짧지만 유난히 길게 느껴졌었던 그 동선은, 한국영화 최고의 명장면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한석규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캐릭터는, <쉬리> 의 요원도, <8월의 크리스마스> 속 사진사도 아니다. 약 20년 전 보았던 <서울의 달>에서 아침 출근길에 뒷굽이 나간 채시라의 구두를 거의 반강제로 빼앗아 고쳐 주던 김홍식이다."
http://mediglish.tistory.com/4426 (한석규 목소리 직접 확인)
(유승호의 천진난만, <집으로...> - 2002, 상호) 아역배우의 문제점(!)을 지적하라면, 아이들이 너무 아이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혹은 너무 인형처럼 예쁘기만 하다는 불만도 터져나올 법하다. 유승호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꼬마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 평범하고 천진난만하며 정당히 떼도 쓰고 가끔씩은 조숙한 짓도 저지른다. 그 '아이 같음'에서 이 아역배우의 힘이 나오는 것 같다. 모두들 걱정(?)했던 <돈 텔 파파>의 흥행은, 70퍼센트 이상 유승호의 힘이었다.
(황정민의 아픔, <로드무비> - 2002, 대식) 그는 영화 내내 고통스럽다. 아마 대식 같은 캐릭터를 연기해야 하는 배우는, 배우 자신이 실제로 고통스럽지 않으면 카메라 앞에 설 수 없을 것이다. 황정민은 이 영화에서 뭐라 정리할 수 없는 복잡한 심리를 보여주어야 했다. 남성적(혹은 마초적) 게이인 그는 한편으로는 연민의 사나이다. 금욕적으로 보이면서도 일순간 욕적을 불사른다. 그러면서도 우람한 산과 같은 인물. 바로 황정민이다.
(봉태규의 깡다구, <눈물> - 2001, 창) 길거리에서 캐스팅되었고 이 영화가 데뷔작이라고? 그렇다면 <눈물>은 타입 캐스팅이었다. 하지만 이후 <품행제로>와 <바람난 가족>에서 보여준 '깡다구 터치'의 연기는, 몇 년씩 연기 수업을 받고 카메라 앞에 선 배우들보다 한 수 위의 내공처럼 느껴진다. 누가 봉태큐처럼 리얼하게 어른들에게 쌍욕을 해대며 개길수 있을까? 선뜻 떠오리지 않는다.
(이재은의 파격, <노랑머리> - 1999, 유나) 어른 뺨치는 연기력의 똘망똘망한 아역이 어느 날 트리플 섹스의 주인공이 되어 "입 닥치고 영화나 봐!"라는 과격한 헤드카피와 함께 나타났다.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등급보류'를 받은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이 배우는 샛노랗게 물들인 머리만큼이나 파격적인 변신을 이루었고, <세기말>에선 원조교제를 <자카르타>에선 은행강도를 '저지른다'. 한때는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배우, 지금은 너무 잠잠하다.
(손예진의 슬픔, <클래식> - 2003, 지혜/주희) 손예진의 입가에 미세하게 보이는 주름은 그녀를 최루성 멜로의 히로인으로 만드는 운명선인 듯 하다.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에서 눈 동그랗게 뜨고 망가지긴 했지만 손예진의 본령은 역시 멜로이며, 1인 2역을 맡은 <클래식>은 가장 슬픈 '손예진의 초상'이다. 언제나 병에 시살리고 빗속에서 울어야 하는 모진 배역운 속에서도 전형화된 느낌을 그다지 주지 않는 것이 그녀의 강점. 차기작 <작업의 정석>은 코미디다.
(양동근의 응축, <수취인불명> - 2001, 창국) 아역 탤런트로 시작해 학원 드라마로 10대를 보낸 그가 전기로 삼은 영화는 <수취인불명> 이었다. 날 것 그대로를 요구하는 김기덕 감독 앞에서, 양동근은 응어리진 사람이 뭔가를 뱉어내듯 카메라 앞에 선다. 미군 부대 근처에서 부랑자처럼 살아가는 흐인 혼혈아 창국. 그의 불안정한 정체성은 세상에 대한 저주와 어머니에 대한 폭력으로 표현되고, 양동근은 내면에 용수철처럼 웅측된 감정을 일순간 폭발시킨다.
(신하균의 광기, <지구를 지켜라> - 2003, 병구) 장준환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라고? 신하균만이 할 수 있는 연기이기도 하다. 과대망상과 편집증, 음모이론과 슬픈 가족사가 뒤범벅된 병구라는 녀석을 가장 병구답게 연기할 수 있는 사람은 단연 신하균 밖에 없다. 영화 내내 번들거렸던 신하균의 광기 어린 눈동자를 잊을 수 있을까? 그의 분노는 '개인' 병구의 것이기도 하지만, '노동자' 병구의 '자본가' 강 사장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다.
(임수정의 순수함, <...ing> - 2003, 민아) 너무나 섬세하게 조각되어 조금만 힘을 주어도 그만 바스러질 유리조각 같은 이미지. 하지만 '배우 임수정'에게 세상을 끌어안을 수 있는 넉넉함 또한 있다는 건 <...ing>가 가르쳐 준 하나의 교훈이다. <장화, 홍련>에서 내면을 바깥으로 내질렀다면 <...ing>의 임수정은 조심스레 마음을 열어 교감을 시도한다. 겨우 세 번째 영화임에도 임수정은 노련함마저 보인다. 엄마 역을 맡은 이미숙과 멋진 앙상블을 이룰 정도로.
(유해진의 매서움, <공공의 적> - 2002, 용만) 어두운 취조실에서 마치 수족처럼 갖가지 칼을 다루는 남자. 능숙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커다란 장미를 수놓은 '무대의상' 같은 양복을 입고 서 있다. 누가 배우라고 얘기해주지 않으면, (배우가 아니라) 진짜 양아치로 착각할 것 같은 생생함. 그 경중을 떠나 일단 맡은 캐릭터를 대하는 유해진의 눈매는 매섭다. 용가리 형님으로 출연한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생수통을 두들기며 노래 부르던 신도 유해진의 명장면.
(이영애의 이기주의, <봄날은 간다> - 2001, 은수) 강한 CF 이미지에도 불구하도, <대장금>의 '바른생활여인'느낌에도 불구하고, 이영애에겐 뭔가 불편한 것이 있다. 그 불편함의 정체는 상우(유지태)에게 "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생뚱맞은 말을 던질 때 조금씩 드러난다. 귀여게 표현하면 '서울 깍쟁이' 같은 그 무엇, 혹은 이기주의. <봄날은 간다>의 이영애는, 한 남자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남기고 포커스 바깥으로 사라진다. 그녀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영화 속 이영애의 모습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90년대 중반으로 기억한다. 어느 드라마 속에서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껌을 질겅질겅 씹어대던 다방 레지의 모습.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이영애의 본 모습니다. 장금이로 상징되는 '바른생활 여인'은 어쩌면 연기자 이영애의 왜곡된 초상인지도 모른다. 나는 <봄날>의 은수, 드라마 속 다방 레지 이영애가 좋다. 금자는 내게는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다. 은수가 더 좋았다."
(장진영의 폐허, <소름> - 2001, 선영) 열심히 발돋움하지만 어떤 결정적 계기를 만나지 못하고 자꾸 미끄러졌던 배우가 있다. <소름> 전까지의 장진영이 그랬고, <소름> 이후의 장진영은 영화를 위해 자기 자신을 버린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이 영화의 폐허는 무너지기 직전의 아파트가 아니라, 장진영 자신이었다. 멍퉁성이 얼굴로 연신 담배를 피워대며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여자. 공허함과 절박함이 피어나는 풍경이다. 이 영화 이후 그녀는 멜로 히로인이 되었다.
"이 영화를 보고 장진영이 연기를 참 잘한다고 생각했다. 같이 주연한 김명민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스크린>의 평과 같이 나 역시 영화인 장진영을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뒤로 그녀를 더이상 볼 수가 없었다. 내가 이 영화를 봤을 때 이미 그녀는 고인이 되어 있었기에."
(김인권의 야생성, <송어> - 1999, 태주) 이 소년이 화면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그 불온한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릴 때, 관객은 한 명의 배우가 아니라 한 마리 야수를 보게 된다. 왜소한 몸집의 표정 "쎈" 어느 배우는 이렇게 데뷔했다. 이후 그는 한때 양아치 캐릭터의 세계를 전전했고, <말죽거리 잔혹사>의 찍새로 다시 그 야생성을 드러낸다. 거칠고 불안하며 비열하고 경박해 보이는, 하지만 연기 잘하는 젊은 배우. 군입대로 한동안 스크린에서 볼 수 없을 것 같다.
"식상한 구분법이지만, '세상에는 두 부류의 양아치가 있다. 하나는 진짜 양아치, 다른 하나는 생양아치'..라고 편가르기를 한다면, <말죽거리 잔혹사>의 찍새는 생양아치일 것이다. <눈물>의 봉태규와 함께."
(류승범의 거침없음,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 2000, 상환) "내가 감독이 되어 가장 잘한 일은 동생인 류승범을 배우로 데뷔시킨 것"이라는 류승완 감독의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니다. 비슷한 연령대의 청춘스타들 중에, 이 세상을 향해 류승범만큼 거침없이 들이대는 사람은 없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 그는 마치 모닥불을 향해 돌징하는 불나방처럼, 죽을 것을 알면서도 칼받이가 되어 뛰어든다. 이후 그는, 그러한 비장미를 아직까지 보여주지 못했다. <주먹이 운다>에 기대를 건다.
(전도연의 얼굴, <내 마음의 풍금> - 1999, 홍연) 전도연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21살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17세 시골 소녀의 순박함을 완벽히 연기해내는 26살의 배우. 그녀의 해맑은 얼굴은 단순한 동안이 아니라 일종의 경이로움 같기도 하다. 여기에 덧붙여지는 천연덕스러우면서도 야무진 말투와 찡한 감동의 표정.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선사했던 <내 마음의 풍금>의 다음 작품이, 당대 파격이었던 <해피엔드>였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설경구의 지독함, <공공의 적> - 2002, 강철중) "형이 돈 없다 그래서 패고, 말 안 듣는다 그래서 패고, 어떤 새끼는 얼굴이 기분 나빠서 패고, 그렇게 형한테 맞은 애들이 사열종대 앉아번호로 연병장 두 바퀴다. 지금 형이 기분이 괜찮거든? 좋은 기회잖냐." 캐릭터가 지독하면 지독할 수록, 설경구는 물 만난 고기로 변한다. '지독한 경찰' 강철중이 되어 내뱉는, 캐릭터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이 대사는, 그 독특한 말투와 함께 알수 없는 쾌감을 준다. 그는 <공공의 적 2>에서 '지독한 검사'가 된다.
(최민식의 눈물, <파이란> - 2001, 강재) 최민식위 우는 얼굴은, 관객에게 견디기 힘든 감정의 소용들이를 선사한다. 그리고 <파이란>에서 우린, 그가 흘린 눈물의 몇 곱절을 쏟아내야 했다. 그는 감정을 터트린다는 것의 완급과 그 진정성을 아는 배우다. 아무리 강한 캐릭터를 맡아도, 그는 절대로 과잉하지 않는다. 그렇게 응축된 에너지는 어느 한 순간 튀어나와 관객의 가슴에 박힌다. 우리가 그의 눈물을 절대 잊을 수 없는 건 바로 그런 이유다.
"다른 말이 필요없지 싶다. 직접 오열하는 모습을 확인하는 수밖에." http://mediglish.tistory.com/1822
(이은주의 흑백영화, <오! 수정> - 2000, 수정) 흑백 화면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 어쩌면 이은주는 흑백영화를 위해 태어난 배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오! 수정>을 보며 잠깐 했다. 실제 나이보다 서너 살 정도 많은 캐릭터를 주로 연기해온 그녀이긴 하지만, <오! 수정>의 이은주는 일반적인 성숙함을 넘어 심란해 보이기까지 했고, 흑백의 콘트라스트가 그 표정을 잘 잡아냈다. 복잡다단한 심리가 뒤엉킨 무표정의 여인. 사람들이 간과하곤하는데, 이은주는 연기를 꽤 잘하는 배우다.
(김선아의 임기응변, <위대한 유산> - 2003, 미영) 컵라면 먹다 국물에 혓바닥을 데자 단무지로 응급처치를 하는 그 장면은, 아마도 김선아의 앨범에서 가장 인상적인 사진으로 남을 것이다. 나름대로 야심은 있었겠지만, 솔직히 <예스터데이>는 그녀에게 잘 안 맞는 옷이었다. 이후 <몽정기>로 시동 걸고 <위대한 유산>에서 본격적인 푼수가 되었을 때, 김선아는 자신만의 톤을 찾은 상태였다. 어리버리해 보여도 순수함을 잃지 않는 장난꾸러기. 하지만 <황산벌>의 서릿발 내리는 모습도 잊을 수 없다.
(송강호의 뉘앙스, <살인의 추억> - 2003, 두만) 헝그리 정신을 이야기한(넘버 3) 송강호만큼 관객들ㅇ게 강한 충격을 주며 다가온 배우도 없을 것이다. 이후 계속되었던 그의 충격요범이 정점에 달한 영화는 <살인의 추억>. 처음 등장할 때부터 이미 그는 연쇄살인 현장을 어슬렁거리는 시골 형사 박두만이 되어 있었다. 순준히 '감'에 의존하는 형사는 장대비가 쏟아 지는 터널 앞에서, 범인일지도 모르는 그 녀석에게 말을 건넨다. "밥은 먹고 다니냐?" 한국영화 사상 가장 묘한 뉘앙스를 지닌 한마디였다.
(하지원의 쇼크, <가위>- 2000, 경아) 사실 그녀는 그 어떤 장르에서도 보통 이상의 연기와 흥행을 이끌어냈던 성실한 배우다. 그럼에도 하지원이란 배우를 존재케 했던 그 무엇을 꼽으라면, 단연 호러퀸 시절의 서늘한 눈빛이다. 그다지 새로울 것 없었던 <가위>를, 대여섯 편의 공포영화가 득실거렸던 2000년 여름의 '호러 승자'로 만든 건 전적으의 하지원의 힘이었다. 공포의 기운으로 가득 찬 두 눈이여.. 최근의 호러킨들은 모두 하지원의 아류들이어라...
(정우성의 질주, <비트> - 1997, 민) <비트>의 '민'이라는 캐릭터는 어쩌면 정우성에게 천형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똥개>에서 아무리 망가져도,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서 아무리 눈물 흘려도, 그에겐 여전히 두 팔을 벌리고 오토바이 위에 앉아 도로 위를 "쏘던" 청춘의 이미지가 남아 있다. "스무 살, 나에게 꿈은 없었다..." 나지막한 독백을 뒤로 한 채, 마치 세상의 끝으로 달려가는 듯한 한 남자의 뒷모습. 그는 아직도 어딘가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배두나의 자연주의. <고양이를 부탁해> - 2001, 태희) 배두나의 독특한 외모는,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인형처럼 예쁜 여배우'의 범주와는 다르다. 그리고 그 나이와 경력에, 그녀만큼 자연스러운 배우를 찾기도 쉽지 않다. <복수는 나의 것>이나 <튜브>같은 삐딱한 역할을 연기했을 때도 빛나지만, 배두나가 가장 배두나처럼 보일 때는 <고양이를 부탁해>처럼 엉뚱하면서도 평범한 아이로 등장할 때다. 아, 그리고.. <굳세어라 금순아>도 빼놓을 수 없겠지.
(박중훈의 페이소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 1999, 우 형사) 박중훈이 지닌 장르적 강점과 상업적 메리트는, 가끔씩 그가 매우 뛰어난 연기파 배우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든다. 그는 자신만의 페이소스를 갖고 있으며 <게임의 법칙>과 <인정사정 볼 것 없다>로 우뚝 섰다. 검은 비가 내리는 듯한 폐광. 우 형사는 드디어 범인과 대면한다. 그가 지닌 것은 비에 젖은 두 주먹 뿐. 두 눈은 환희에 들뜬다. 이런 불멸의 이미지는, 한 배우에게 그렇게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신구의 묵묵함, <8월의 크리스마스> - 1998, 정원의 아버지) 그는 영화를 떠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로 돌아왔다. 죽음을 앞둔 이들이 리모콘 작동법을 하나하나 가르쳐주는 장면에서, 그 아버지는 별 말이 없었다.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듯, 혹은 이런 거 하르쳐줘 봐야 다 잊어버린다는 듯, 그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반칙왕>에서도 <YMCM 야구단>에서도, 그는 말보다는 '뒤에서 지켜봄'으로써 존재하는 아버지였다. 그리고 TV 드라마 <네멋대로 해라>에선, 세상에서 가장 슬프게 우는 아버지가 된다.
"밤에 한석규가 이불 속에서 훌쩍이던 그 소리를 잠자코 듣고 있던 아버지 신구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공효진의 터프함, <품행제로> - 2002, 나영) 한때 권상우가 항상 교복 차림으로 등장했던 것처럼, 공효진은 여자 '교복배우'였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화산고>(주로 도복차림이었지만), <킬러들의 수다>, 그리고 <품행제로>까지, 그녀는 마치 '삐딱한 여고생'의 전형처럼 등장했다. <품행제로>에서 공효진은 불량 서클리더며 롤러 스케이트장 '죽순이'다. 예의그 짜증잔 표정으로 등장해 영화를 휘젓는 터프함. 한국영화에서 정말 찾아보기 힘든 이미지다.
(이미숙의 뒷모습, <정사> - 1998, 서현) 12년의 공백을 가진 여배우의 귀환. 과거의 '연기 잘하는 배우'였던 이미숙은, 잊혀진 시간 동안 아우라를 만들었다. 우아하면서도 처연한 <정사>의 이미숙이 보여주는 눈빛엔 나이가 들어가는 여인의 서글픔 혹은 두려움이 깃들어 있다. 그녀는 새로운 사랑 앞에서 유혹을 느끼고 흔들리고 고민한다. 그녀는 그 감정을 말로 표현하지 않는다. 수줍은 듯 돌아선 그녀의 벌거벗은 등. 이 '불륜영화'가 아름다울 수 있었던 건, 그녀의 진솔한 뒷모습 때문이었다.
(염정아의 서늘함, <장화, 홍련> - 2003, 은주) 토끼처럼 오들오들 떠는 두 아이 앞에서 서릿발 가득한 눈을 부릅뜨고 냉기를 날리는 여인. 영화 데뷔 10년 만에 드디어 몸에 맞는 의상을 입은 듯, <장화, 홍련>에서 그녀가 보여준 에너지는 대단하다. 어딘지 모르게 막혀 있는 느낌을 주었던 배우가 드디어 물꼬를 튼 느낌. 이후 염정아는 <범죄의 재구성>에서 완전히 제 세상을 만났고, <여선생 vs. 여제자>에서는 확실히 몸이 풀린다. 이렇게 쉽게 풀릴 것을 지난 10년 동안 왜 그렇게 힘들었얼까?
(안성기의 주름, <킬리만자로> - 2000, 번개) 80년대는 분명 그의 시대였다. <투캅스>와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포진한 90년대에도, 그는 건재했다. 하지만 21세기는 그에게 시련의 세월이었다. <킬리만자로>의 퇴락한 보스 '번개'에게선 20년 동안 60편 가까운 영화에서 수많은 얼굴을 보여주었던 안성기의 '피곤함' 같은 것이 느껴진다. 거칠면서도 평범하고 일견 우습기도 한 번개라는 캐릭터. 이 영화의 비장미 넘치는 결말은, 안성기라는 배우의 '주름'없이는 불가능했을 명장면이다.
(김태우의 자폐증, <버스, 정류장> - 2001, 재섭) 슬퍼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처진 눈매만 본다면, 혹은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만 듣는다면, 인간적이며 포근한 남자 타입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김태우에겐 의외로 어두운 구석이 있다. 그러한 그늘진 모습이 비루한 일상 혹은 희망 없는 내일과 만났을 때, 그 남자는 한없이 자기로 숨어드는 것 같다. <버스, 정류장>의 김태우. 그는 오래된 상처를 품은 채 감정을 억제하며 살아간다.
(문성근의 얄미움, <질투는 나의 힘> - 2003, 윤식) 그를 지식인으로 만든 건 <그들도 우리처럼>이었고, 속물로 만든 건 <경마장 가는 길>이었다. <세상 밖으로>에선 양아치가 되었고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선 무능력한 남자가 되었다. 솔직히 그런 남자는 일찍이 없었다. <질투는 나의 힘>의 문학잡지 편집장 한윤식은 한 남자의 애인을 두 번이나 빼앗아 간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렇게 부도덕하게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귀여운' 구석 마저 보여 준다. 그 어쩔 수 없는 얄미움이여!
(성지루의 폭력 - <눈물> - 2001, 용호) 연극무대에선 이미 베테랑 연기자였지만, <눈물>의 룸살롱 주인이 되어 스크린에 데뷔했을 땐 정말 생소한 존재였다. 그난 자신의 업소에서 일하는 가출 소녀를 사랑하지만, 그 방법론은 폭력이다. 성지루가 보여주는 폭력의 방식은 충격적이다. <바람난 가족>은 그 정점이었다. 그가 저지르는 느닷없는 살인 앞에서 일말의 혼란감을 느끼지 않은 관객이 있었을까? 순박한 얼굴이기에 더욱 선명하게 기억되는 폭력의 낙인.
(강동원의 유혹 - <늑대의 유혹> - 2004, 대성) <그녀를 믿지 마세요>에서 순진한 총각으로 등장해 온갖 고생을 할 때만 해도, 그 모델 출신 연기자가 영화배우로서 얼마나 갈지는 사실 의문이었다. 청춘스타의 신드롬이라는 면만 놓고 본다면 올해 최고의 영화로 기록될 <늑대의 유혹>에서, 강동원은 말 그대로 관객을 유혹했고 극장 안은 그가 등장하는 장면을 핸드폰으로 찍는 관객들로 연일 번쩍거렸다. 그의 차기작은 이명세 감독의 <형사>. 그 세련된 외모가 사극에도 어울릴까?
(문근영의 사랑, <어린 신부> - 2004, 보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 '로리타 콤플렉스' 운운하며 비난의 화살을 돌리지 않는 건, 전적으로 문근영의 힘 때문이다. "나는 사랑을 아직 몰라 ~" 노래를 부르며 귀엽게 춤추는 여고생 문근영을 보면, 왠지 모를 행복감이 조금씩 스며든다.(<장화, 홍련>의 주눅 든 모습조차 해맑아 보였다). 문근영에겐 대중을 무장해제시키는 힘이 있다. 아무리 까다로운 관객도 문근영의 모습을 보며 눈살 찌푸리긴 히들다. 그녀는 요정일까?
(김상경의 엉뚱함, <생활의 발견> - 2002, 경수) 매끈한 모습으로 브라운관을 누비던 김상경은 홍상수라는 '일상성의 관찰자'와 만나면서 자신 안에 잠재되어 있던 묘한 숨결을 토해냈다. 춘천과 경주를 오가며 두 영자와 엉뚱한 사랑을 나누는, 좀 덜 떨어져 보이고 삶 자체가 허허로워 보이는 남자 경수. <살인의 추억>에선 "서류는 거짓말 안 하거든요."라며 진담 반 능청 반의 표정을 지었지만, 그의 명대사는 단연 <생활의 발견>에 있다. "캔 유 스피크 잉글리시?" 배우의 발견이다.
(장동건의 죽음, <친구> - 2001, 동수) 장동건은 처절한 죽음을 통해 비로소 배우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는 청춘스타 이미지를 벗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그 시도가 <인정사정 볼 것 없다>였다면, <친구>의 동수 캐릭터는 장동건이란 배우의 스펙트럼을 족히 두 뼘은 넓혀 놓은 영화다. 친구에게 배신당한 동수는 난도질 당한 채 죽어간다. "마이 묵으따 아이가.. 고마해라.." 그가 그런 대사를 힘겹게 내뱉으며 비오는 거리를 나뒹굴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 월간 <스크린> 2004년 12월호 부록, <명배우 명장면 100> 중에서